가족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피 한 방울 안 섞인 또 하나의 가족
레드 플래그의 탄생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색하게도 혈연 중심의 가족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인 2040년,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또 하나의 가족, ‘레드 플래그’가 탄생했다. 『레드 플래그』는 상처받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연대를 그리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다. ‘사고뭉치들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준다’라는 서사는 오랫동안 전해져 온 이야기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점점 현실에서 사라져 가는 그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레드 플래그』의 가장 큰 매력은 개성 강한 등장인물과 그들 간의 케미이다. 고집불통인 일흔 살 노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못 하는 아홉 살 남자아이, 한없이 우울감에 빠져 있는 열일곱 살 여고생. 그리고 그들을 돌봐야 하는 AI 돌봄 로봇 키리에까지. 아무 접점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처음 만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다투는 걸 시작으로, 여러 사건을 함께 겪어내고 서로의 상처에 공감하며 어느덧 하나의 가족이 된다. 성별, 나이, 살아온 환경 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의 상처에서 자신의 상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받은 이들의 연대가 레드 플래그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또 하나의 가족을 탄생시켰다.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자신의 일기장에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적는다. 정신질환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아무렇지 않게’ ‘보통 사람들처럼’ ‘남들 다 하듯’ 지내는 것이다. 이는 타인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고충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마저 그들에게 정상적으로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작중 레나의 엄마인 혜주 역시 마찬가지다. 혜주는 우울질환을 앓고 있는 딸이 정상적으로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감정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이모칩(Emotion-Chip)을 개발한다. 하지만 그 ‘정상적으로’라는 욕망이 레나와 혜주의 삶을 망가뜨린다.
과연 감정을 대신 조절해 준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감정을 자동으로 조절해 준다고 한다는 이야기는 일견 편리하게 느껴진다. 화가 나도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너무 들떠서 일을 그르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히는 일도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태를 우리는 행복한, 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감정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칩을 이식받는다면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답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유난스럽다는 기준이 어디서부터 나온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온전히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다면 로봇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인간만이 가진 유일성과 특별함을 존중합니다.”
-본문 중에서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세상
우리에게는 로봇이라도 필요할지 모른다
어느덧 1인 가구 비율이 4인 가구 비율을 넘어섰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텅 빈 방이 주는 쓸쓸함을 맞이한다. 저녁은 잘 챙겨 먹었는지, 내일 해야 할 일은 없는지, 화장실에 수건이 몇 개나 남았는지, 오늘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현대인들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 귀여운 고양이 눈매로 ‘나’를 궁금해하는 키리에가 있다면 어떨까?
『레드 플래그』 속 키리에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AI 치유 로봇’인 키리에는 레드 플래그 회원들의 상태를 확인해 주고, 문제점을 진단해 밉지 않게 해결 방법을 권유한다. 익살스럽게 그들의 표정을 따라 하기도, 진지하게 문제점을 짚어주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위로의 말을 건네며 상처받았던 레드 플래그 회원들의 마음을 치유한다. 혼자가 점점 익숙해지는 세상, 언젠가는 키리에와 같은 치유로봇이 우리 인생의 반려와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