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눈앞으로 당겨 오는 시,
익숙한 일상을 뒤집는 언어의 놀이터
한재범의 시는 직관적인 이해를 의도적으로 비틀며 일종의 읽기 과제를 부여한다. 있음과 없음, 존재와 존재의 부재가 충돌하는 구도 속에서 얽히고설킨 문장들은 어느새 출구가 여러개인 언어의 미로를 만들고,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의식적으로 재배치하거나 동시에 겹쳐놓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사건들은 결국엔 선후를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은 “자연사박물관 밖에는 자연이 있고/자연사박물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박물과 나」), “지옥은 어디에나 있지만/어디에는 없고”(「나는 내일부터」)처럼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문장을 즐겨 쓴다. 행과 연을 미묘하게 배치하여 낯선 효과를 거두고, 의도적으로 문장성분을 생략하거나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 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커피는 검다」), “젖지 않았는데 이미 젖어 있다”(「불성실」), “문이 없어서 자꾸만 문이 열리는 방 안”(「연습생」)처럼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문장을 교묘하게 연결하여 인과관계를 조작하는 방식 또한 주요한 시적 전략으로 삼는다. “보이지 않으니까 믿을 수 있”(「연습생」)고 “미래가 지루해져서 돌아오지 않는다”(「휴양지」)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현실감각을 뛰어넘는 문장 구성은 어두운 세계 한복판에서 잠시 눈을 감고 꾸는 꿈처럼 몽환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극장을 빠져나와 우린 밝은 무대 위를 걷는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시작되는 삶이라는 일인극
작법을 넘어 한재범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내가 있어도 없어도 무방할”(「아직 여기」) 세계에서 “흔한 풍경”(「너무 많은 나무」)이 되어버린 ‘나’의 이야기와 이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마치 일인극을 보는 듯 시인과 화자와 자아가 중첩되거나 일치되는 장면들은 시집 전반에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는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았다”(「코끼리 코에 걸린 코끼리」), “나는 꽤 자연스럽다”(「레디믹스트콘크리트」), “밖에서 나는 나의 역할을 맡는다”(「직물과 작물」)와 같은 발화가 보여주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무심히 관찰하는 또다른 ‘나’의 시선이 더해진다. 자연히 이 시집에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화된 존재”(추천사)로서의 자아가 나타나게 된다. “영혼이 자꾸만 내 몸을 벗어나려고”(「유원지」) 하기에 ‘나’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이해받지 못한 타인에게 “나를 해명해야 할 거 같아”(「없는 게 없는」) 시는 끊임없이 ‘나’에 대해 묻는다. “일생의 절반”이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지하”(「나는 내일부터」)인 삶, 때로는 경험하지 않은 미래가 지루해져버리는 삶이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틀을 벗어나볼까도 생각하지만 그렇게 “나를 그만두려는 마음”(「휴양지」)이 들끓어도 결국 “내가 나라는 사실”(「유원지」)이 자명하고, “나는 사람이 아닌 적 없다”(「사거리」). 그리하여 시인은 선언한다.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인간이 될 계획이다”(「많은 나의 거북이」). 한발 더 나아가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레디믹스트콘크리트」)고 말하며 오지 않을 것 같은 먼 미래를 삶의 한복판으로 끌고 온다.
한재범의 시는 발상과 발성 면에서 근래의 신인 시인들과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다. 고유한 화법은 단순히 새로운 제안을 뛰어넘는 설득력을 가졌고 독특하다기보다는 도발적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를 풀어내는 시적 에너지가 생동감 있고 다채롭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세목과 일상의 풍경을 이전과 다르게 감각하도록 한다. 참신함을 뛰어넘는 기발한 발상과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문법으로 견고하게 다진 그의 시 세계는 ‘미래의 시’의 한 전범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이 당찬 시인이 “지상과 다른 곳”(「승강기」)을 향해 뻗어가 자신의 세계를 더 넓고 더 깊게 확장해나가리라 믿으며 그가 다음에 연출해낼 “삶이라는 일인극”(최다영, 해설)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