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영(徐有英)이 1863년에 지은 한문 장편소설 《육미당기》는 영웅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신라 소성왕(昭聖王)의 아들 소선 태자(簫仙太子)가 부왕의 병을 고치고자 험난한 바다를 건너 영약(靈藥)을 구해 오다가 사악한 이복형 세징에게 약을 빼앗기고, 그가 뿌린 독약에 눈이 머는 등 온갖 역경을 겪는다. 조력자의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중국에 들어간 김소선은 당나라 덕종(德宗)의 사위가 되고 변방을 정벌하는 공을 세우는 한편, 당나라의 공주를 비롯해 세 부인과 세 첩을 맞아들여 신라로 귀국한다.
간략한 서사만 살펴보면 《육미당기》는 기존의 영웅소설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육미당기》는 ‘남성’과 ‘영웅’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기존의 영웅소설과는 전혀 작품이다. 김소선의 떠남과 귀환의 과정에서 결연을 맺는 여성들의 모험담이 《육미당기》의 또 다른 중심 서사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육미당기》에서 김소선의 영웅성은 기존 작품의 ‘영웅’들에 비해 다소 약화되어 있다. 그의 능력은 음악과 문장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조력에 힘입어 활약한다. 반면 여성 인물 백운영은 소극적인 영웅성을 보이는 김소선과 달리 적극적인 영웅성을 보인다. 그녀의 비범한 능력은 ‘문(文)’과 ‘무(武)’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운명을 거부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 초월적인 영웅으로 성장해 활약한다.
한편, 설서란과 그녀의 시녀 춘앵의 이야기는 또 다른 층위에 있다. ‘남성’이 아닌 동시에 ‘영웅’도 아닌 그들은 비범한 능력을 갖추지도 못했으며, 영웅으로서 활약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수난담이다. 부모와 이별하고 거처할 집마저 불탄 상황에서, 규방의 약질로 성장한 그녀는 바깥 세계의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된다. 인신매매와 겁탈을 비롯해 ‘여성’이라는 신체에 가해지는 여러 위협과 이를 피하기 위한 두 여성의 힘겨운 사투는 《육미당기》의 또 하나의 중심 서사다. 결국 김소선에 의해 구원된다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서사는 ‘남성’도 아닌 ‘영웅’도 아닌 한 개인의 자기 구원의 서사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