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승규의 일생
저자는 어려서 부친에게서 한학을 익혔다. 20대 초반에 상경해 성균관에 입학한 후엔 일제의 국권 침탈을 목도하며 근대 학문과 민족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재학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했고,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국권회복운동 전면에 나섰다. 합방 후에는 만주 한국사관학교(신흥무관학교 전신) 설립에 참여했으며,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지역 유지들과 힘을 모아 4년제 소학교인 옥성학교(玉成學校)를 설립했다. 이후에도 여러 방면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기자로 입사해 언론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20년에는 보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 설립에 참여했다. 1922년에는 휘문학교로 자리를 옮겨 후진 양성과 조선어연구회 및 집필 활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한편 1931년 친일 성향의 조선유림연합회 설립 총회에 총재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1936~1939년 조선총독부 직속 명륜학원 강사를 겸직했다. 1942년과 43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경학원잡지(經學院雜志)』에 「조선시학고(朝鮮詩學考)」를 잇달아 발표하는 등 그간과 조금 다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난 친일 행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경학원 내 친일 세력과도 오래잖아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해방 후에는 전조선문필가대회에 추천 회원으로 참여했으며, 전국유교연맹을 결성하면서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7년부터 6.25 발발 때까지 서울시립농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다 귀향했고, 1954년 3월 1일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저술들
그는 문필가이자 시인으로 신문 지면을 통해 한국 한시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저술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먼저 ‘창동시집(滄東詩集)’이란 부제가 달린 『간암만록(艮庵謾錄)』에 240제 347수의 자작 한시를 남겼다. 필사본 『계원담총』 뒤에도 『간암만록』이란 같은 제목 아래 30제 41수의 한시가 따로 남아 있다. 시화로는 『계원담총』이 대표작이고, 이밖에 『동양시학원류(東洋詩學源流)』와 『대동시화집성(大東詩話集成)』이 있다. 따로 『계산시화(桂山詩話)』, 『시단금설(詩壇金屑)』, 『일사시화(逸史詩話)』 등의 3종 시화를 신문 연재 형식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보건대 이승규는 무엇보다 특별히 시화 방면에 큰 성과를 남겨 일제 강점기 1930년대 시화사에서 우뚝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교과서로는 『중학한문독본』(박문서관, 1920)을 남겼다. 보성고보 교사 시절인 1920년에 이광종(李光鍾)과 함께 쓴 것으로, 일제 강점기 이후 한문 교과서의 기준이 된 의미 있는 책자다. 그의 산문 중에는 『정다산선생전』과 『이충무공전』이 단연 눈길을 끈다.
『계원담총』, 근대 시화사 끝자락의 정채로운 시론
『계원담총』이란 책의 제목은 한시 문단의 여러 작가와 작품 및 고사를 총합한 이야기 묶음이란 의미다. ‘계원’은 종로구 계동(桂洞)에 있던 저자의 처소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신라 최치원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 문원(文苑), 즉 문단(文壇)의 뜻도 담긴 중의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제 『계원담총』이 품은 시론의 핵심과 시화집 구성 및 그 내용의 특징을 요약해 짚어본다.
__시관(詩觀)에 대하여
이승규는 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다. ‘성정지정(性情之情)’을 얻은 바탕 위에 ‘견사(遣事)’와 ‘속대(屬對)’, ‘추자(錘字)’와 ‘결향(結響)’이 제각기 온당함을 얻어야 함을 주문했다. 즉, 서사는 간결하게, 대구는 온당하게, 글자는 노련하게, 소리는 고상하게 놓여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혈맥이 살아 움직이고 수미가 갖추어져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근대의 한시들을 보면 서둘러 이루려다가 너무 밋밋해지고, 재주를 부리려다 기교에 빠지고 마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전체 작품의 연결과 구성을 따지지 않고, 한 연(聯)의 공교로움만 다투느라 전편의 완성도를 잃고 마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시관(詩觀)을 통해 자신이 『계원담총』에서 시를 선별한 기준을 비교적 분명히 제시한다.
__평시(評詩)의 기준에 대하여
시를 평하는 데 염두에 두어야 할 다섯 가지 측면도 언급했다. 첫째는 시대별로 풍조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 특유의 취향이 있으므로, 현재 취향으로 옛 시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째는 작가별 개성의 차이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고, 색깔이 다르기에 한 가지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 셋째는 각각의 시편이 지어진 정황이 다른 점이다. 그때 그 의경(意境) 속에 놓여보지 않고서 주관적 판단에 따라 멋대로 평가할 수 없다. 넷째는 옛 시의 감춰진 행간을 뒷사람이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당시 무언가 뜻이 있어 한 말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쌍방의 감수에 큰 차이가 발생한다. 다섯째는 취사선택의 기준이 같지 않은 점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평가 또한 달라지고 만다.
__조선 후기 및 근대 시단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선
『계원담총』은 전체적으로 일관된 순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큰 주제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제가 시인의 풍격과 대표작을 시대 순으로 예시하여, 시사(詩史)를 통시적으로 살피려 노력했다. 인용한 매 작품 끝에 단 작가의 촌평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명확히 짚어내 평자의 균형 잡힌 선시(選詩)와 시평의 안목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계원담총』의 가치는 조선 후기와 근대 및 당대 시단에 대한 충실한 보고를 담고 있는 데서 더욱 빛난다. 이는 이전 시기의 시화들과는 결을 크게 달리하는 부분이다. 아울러 선별한 작가들의 구성으로 보면, 역대 시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재야의 시인을 소개하려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한시의 미학 가치가 퇴조하던 시기에 전통적 미감과 안목으로 펼쳐 보여준 한시사 정리는 그래서 더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