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시인은, 햇살에 가지가 부러진 겨울나무가 “노래가 될 때까지” 견디는 것은 나무의 “가슴이 먼저 울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에는 상처가 도처에 그리고 아무 때나 있다. 위 시에서도 비바람이나 폭설이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눈부심”이 상처를 남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눈부심”은 광학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전에 내린 ‘눈’까지 포함하는 생(生)의 서사를 가리킨다. 박노식 시인에게 생은 결국 “눈부심”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환희’이거나 달관이 이루어낸 무갈등의 세계가 아니다. 도리어 “시린 몸”이면서 그것을 초월하려는 몸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울음”은 그 몸짓의 다른 이름이고, 시인이 가 닿고 싶은 초월의 자리는 “노래”이며 어떤 시편들에서는 “꽃”으로 표현된다.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 다음에 실린 작품인 「그 봄날을 잊지 말아요」에서도 ‘울음’을 말하고 있거니와, 「그 봄날을 잊지 말아요」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 봄날에 울어본 이는 설움의 극치를 아는 사람
어찌하여 잠 못 드는 밤에 별들마저 숨어버리는지
새들은 소리를 잃고 바다는 파도를 잃었네
땅은 검고 하늘은 부옇고 나무들은 메말라서 암흑뿐,
너의 다섯 발가락과 너의 다섯 손가락이 지워졌네
초침이 떨어져 시계는 온전치 못하고,
누가 저 암울한 유리 벽을 깨부수고
올바른 우리의 숨소리를 바로 살릴 수 있을까
_「그 봄날을 잊지 말아요」 부분
이 시에서 우리는 박노식 시인의 “울음”이 단지 자기 감상이 아니라 삶을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설움” 때문에 발생한 것임을 명징하게 확인하게 된다. “설움”의 순간에는 별들도 숨고, “새들은 소리를 잃고 바다는 파도를” 잃는다. 이 구절 이하는 1연에서 말한 “설움의 극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미지의 성좌(星座)다. 하지만 시인은 “떠나지 말자”고 한다. 도리어 “잔잔한 파도를 만들고 아름다운 아지랑이를 만들”자고 한다. 그런데 어투가 독백 같다. 그리고 이 독백 투의 발성이 박노식 시의 서정을 이룬다. 박노식 시인의 시에서 명령이나 주장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독백의 서정 때문이며, 이 독백은 시인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에 독자들의 가슴을 뒤덮는 운무(雲霧)가 된다. 이렇게 시는 시인에게서 나오지만 그 사방을 휘감으며 영혼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몸 너머의 노래와 꽃
서정시를 단지 가슴으로 쓰는 것이라는 인식은 자칫하면 가슴마저 ‘몸’이라는 진리를 놓치고는 한다. 물론 서정시는 순간순간 ‘몸’을 떠날 때가 있고 ‘몸’을 초월한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박노식 시인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 근원과 거기에 이를 수밖에 없는 여정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어떤 초월의 날갯짓임을 느낄 수 있다. 몸-세계에서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려는 이러한 시적 상태는 다른 사물과 감응하면서 몸-세계를 넘어서려는 ‘수동적 의지’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물증(?)들을 읽어보면 어떨까.
번개가 다녀간 나의 몸은 이제 숯이 되었다
아지랑이든 흰 구름이든 풀벌레 소리든 눈보라든 내 심장의 근심들도 모두 숯 속에 있다
_「숯」 부분
봄이 내 몸을 일구며 겨드랑이에 씨앗을 뿌리고 오금에는 수선화를 심는다
몸이 계절이다
_「몸이 계절이다」 부분
직접적으로 “몸”이 말해졌다고 해서 박노식 시를 ‘몸의 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섬진강」에서도 ‘몸’이 어떤 식으로든 박노식 시의 핵심임을 보여주는데, 물론 박노식 시인은 몸을 몸으로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섬진강」에서 “적막을 배우려거든” “귀를 빼앗기고/ 온전히 자기를 잃는 순간”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시인은 몸을 벗어나는 것이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잃는 순간”(=“무아의 경지”, 「무아의 경지에 이른 새」)이 곧 ‘노래’이고 ‘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노래’와 ‘꽃’이 결국 ‘몸’이 없었다면 꿈꿔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박노식 시인이 염원하는 초월이란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철저하게 서러워하면서 가는 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설령 세인들이 “누가 너더러 시 쓰래?”(「누가 너더러 시 쓰래?」)라고 조롱을 하더라도 말이다. 이 조롱이 어쩌면 시인의 시를 깊어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