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기-고대 후기와 11~13세기 유럽 경제의 팽창기 사이-역사에서 카롤링 경제의 위치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카롤링 시대는 이전 세기와 달리 경제 부흥의 시기였는가, 아니면 타운이나 교역이 존재하지 않았던 자급자족하는 농업경제의 최저점이었는가. 저자는 카롤링 시대는 대규모 장원에서 수행되는 농업이 경제의 주된 토대이기는 했지만, 여기에서 생산된 잉여생산물이 지역적 또는 국제적으로 활발히 거래되던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이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수도원들의 영지명세장과 왕의 칙령들, 그리고 다양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기반으로 카롤링 경제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중세 초기 유럽의 경제ㆍ사회상을 알려주는 영지명세장
수도원장인 영주가 작성한 영지명세장에는 영주직영지 내의 곡물 경작지와 돼지를 방목할 수 있는 임야의 면적,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물레방아의 수 등뿐만 아니라 수도원 속민의 보유지 면적과 공납ㆍ부역 의무 등이 기록되어 있어 장원의 구조와 운영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곡물ㆍ소금ㆍ포도주ㆍ수공업 제품 같은 생산물 대부분은 장원 조직 안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속민에게 부여된 공납과 부역 의무는 이러한 생산물의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장원에서 생산된 잉여생산물의 판매와 부족한 물품의 구매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지명세장은 중세 초기 유럽의 장원제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더 없이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는 그중에서도 학술적 가치가 가장 높다고 인정받고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 일부가 아주 짧게나마 직접 인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0여개 정도 전해지고 있는 카롤링 시대의 영지명세장 대부분을 저자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영지명세장과 칙령, 그리고 고고학적 사료들에서 나타난 카롤링 경제의 역동성
일부 학자들은 생산이 장원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카롤링 시대에는 생산물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고, 상업이나 교역이 부재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카롤링 시대에도 도자기나 직물, 유리, 철제 용구와 같은 다양한 물품들이 생산되었으며, 주로 왕이나 영주들을 위해 상업 활동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만큼 충분히 자유로웠던 상인들에게 의해 지역 간 또는 국제적으로 활발히 거래되었고, 타운의 존재와 역할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카롤링 왕들이 통행세를 부과하고, 다리와 같이 교역에 필요한 수송 인프라와 일부 시장을 직접 관리하며, 무기의 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화폐 정책을 시행한 일 등 역시 이를 뒷받침해준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영지명세장을 비롯한 다양한 문서와 고고학적 증거들을 구체적으로 인용하면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시대를 둘러싼 논쟁이나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연구의 한계도 소개하고 있어 중세 초기 유럽의 경제사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카롤링 시대 경제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