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과 일상에서 찾는 ‘소확행’ 행복론
- 손해일(시인, 문학박사, 국제펜 제35대 이사장)
[1] 들어가는 말
고태화 시인의 제2시화집 「오선지 위에 휴식」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일반적 시집이 아니라 시화를 곁들여 공들인 작품집이라 더욱 귀한 것이다. 작가에게 작품은 생명이라서 그냥 낱개로 있으면 흩어진 구슬에 불과하지만, 꿰어야 비로소 보배가 된다. 시집은 자신의 분신인 작품에 집을 지어주는 일이다. 전남 장성 출신의 고시인은 첫 시집 「그리움 속에 피어난 그리움」과 여러 권의 공저를 내었으며, 샘문예술대학 학장으로 기여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서, 시낭송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제1부 〈인생은 술래〉, 제2부 〈호박꽃도 꽃이랑게〉, 제3부 〈벤치에 핀 설화〉 제4부 〈항아리들 음악시간〉으로 나뉘어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하고 있다. 필자 나름대로 고시인의 작품세계를 요약하자면 〈옛 추억과 일상에서 찾는 ‘소확행’ 행복론〉이라 하겠다. 잘 알다시피 ‘소확행’이란 무슨 거창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가까운 일상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즐기자는 사회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시의 기본에 충실한 고시인의 작품들은 치열한 사회비판보다는 특히 고향의 옛 추억과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성과 ‘소확행’을 밝고 긍적적인 톤으로 노래하고 있다. 난해한 언어유희보다 서정성과 스토리를 골격으로 하고 있어 쉽게 읽힌다. 이제 작품을 통해 이를 확인해본다.
[2] 고향에 대한 추억의 편린들
우선 표제 시 「오선지 위에 휴식」을 살펴본다.
청명한 봄의 고향 하늘/ 기러기 브이자 모양으로 날자/ 희미한 오선지 선을 긋고/
날아가 버린 제트기 음표만 남기고//
꽃다운 청춘이여/ 햇살 닮은 그대의 아름다움/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 창공을 향해/
소곡을 연주하듯 비행을 하네//
새하얀 허공 속에 까만 브이자 무리/ 오선지 위에 천천히 쉬어 가는 쉼표/
잔잔한 소곡에 필요한 멜로디 리듬 화성/ 흥에 겨워 활기차게 떠나는 빠른 그루브//
환상적인 리듬 안에 보이지 않는 즐거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자연의 어울림/
푸른 하늘 기러기 날고 제트기 날고/ 텅 빈 허공 오선지 위 난, 쉬어가네!//
- 「오선지 위에 휴식」 전문
4연으로 된 이 시는 청명한 봄, 고향 하늘을 배경으로 비유와 상상력을 구가한 작품이다. 첫 연은 기러기가 브이(V)자 모양으로 떼지어 날고 여기에 제트기가 날아간 뒤 오선지를 남기자, 마치 음표 모양이 되었다. 여기서 ‘오선지’란 제트기가 날아가며 꽁무니로 하늘에 남긴 하얀 제트기류가 마치 오선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연은 햇살 닮은 꽃다운 청춘의 아름다움이 창공을 소곡처럼 비행한다. 셋째 연은 제트기류가 남긴 하얀 오선지 위에 기러기 떼의 까만 브이자 무리는 쉼표 같기도, “흥에 겨워 활기차게 떠나는 빠른 그루브” 같기도 하다. ‘그루브’의 의미 중 첫 번째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빠른 템포의 소곡 리듬이다. 넷째 연은 기러기 떼와 제트기류가 빚어내며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자연의 텅 빈 허공 오선지 위에서 ‘화자는 쉬어 간다’고 한다.
화자는 기러기와 제트기를 비유해 의인화함으로서 자연과 교감하고 일시적인 마음의 안식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 화자의 추억은 주로 고향 마을에서의 어릴 적 추억과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다. 아무리 고생스럽던 과거도 이를 극복하고 세월이 지나면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으로 삶의 원동력이 되며 행복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특히 고향 태자리가 그렇다. 다음 작품 「우리 집은 금성길 37」을 살펴본다.
태어나고 자라왔던 내 고향 금성길 37/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언제 어디서나 똘똘 뭉친 육 남매//
어릴 적 앞마당에 동서남북 선을 그어/ 동전만 한 구멍 파고 구슬치기하고/
너른 마당에서 두 손으로 눈 가리고/ 숨바꼭질하던 그 시절 그립다//
움푹 파인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 모여/ 뜀박질하다 넘어지면 어느새 일으켜 주시던/
할머니의 따뜻한 간호가 그립다//....//
지금은 인기척 없는 텅 빈 집/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마저 세상을 떠나시고/
육 남매 각자의 세월 속에 최선을 다할 때/ 두 해 전까지 아버지가 머무셨던 곳/ ....//
이제는 텅 빈 자리 채워줄 사람 대신/ 거미줄만 치렁한 쓸쓸함 흐르는 외로운 집//
큰 대문 열고 들어가 아버지 불러 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어 토방에 올라 방문을 열고/
또다시 자그마한 소리로 아버지 불러 본다//
그런데 뒤꼍을 서성이시던 아버지가/ 방 뒷문을 여시며 금방이라도/
“어서 오니라” 하시며 웃어주실 것만 같다//
- 「우리 집은 금성길 37」일부
저자가 특별히 각주로 표시한 추억의 고향집 ‘금성길 37길’ (삼계면 금성부락 65번지)은 앞산 뒷산 야산 마을 비단성을 두른 수려한 풍경과 인심이 비단결 같다고 해서 ‘금성錦城’이라고 했단다. 조부모와 부모와 6남매, 합해서 10명의 대가족이 살던 이 고향 집에서 저자는 구슬치기 숨바꼭질 등으로 동심을 키웠지만, 지금은 폐가가 된 고향 집의 텅 빈 마루, 알미늄샷시문, 거미줄만 치렁치렁한 외로운 집이 되었다. 큰 대문 열고 아버지를 불러보면 금방이라도 “어서 오니라” 하고 웃어주실 것만 같은 환상에 빠진다. 인간의 회귀본능과 수구초심 때문일 것이다.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과 농촌 고령화로 가속화되는 ‘농어촌 공동화’는 우리가 직면한 정책적 해결 과제다.
이 시집에서 「자연의 소리 귀한 소리」 「흑백필름」 「태양의 자식, 황금 들녘」 「탈출」 「인생은 술래」 「삯바느질」 「비와 양철지붕」 「추억 속의 장맛비」 「행복의 열쇠」 「두렁 두렁 두렁」 「숨바꼭질」 「추억의 개울물」 「호박곷도 꽃이랑게」 「울 엄마」 「항아리들 음악 시간」 등은 고시인의 농촌 정서와 추억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착하디착한/ 울 엄마/ 엄마의 기억이/ 갈수록 점점 흐려진다//
봄 햇살이/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길거리 벚나무 조팝나무/ 하얀 꽃잎 산들바람이 깨우고//
울 엄마/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가물거린다//
- 「울 엄마」 전문
「울 엄마」는 비교적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착하디착한”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본인도 늙어가는 지금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린다. 그러나 동서고금 인류 여하를 막론하고 모성은 영원한 것이며, 그리움과 안식의 첫 번째 요람이다. 인용은 생략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삯바느질의 장인」에 담겨있다. 아래 작 「두렁 두렁 두렁」은 “농작업의 출발선” “농부들이 지친 몸 주저앉아 쉼 하는 곳” “누런 칡소 워낭 소리/ 뎅그렁뎅그렁 쉼 하는 곳”이다.
지금은 편리한 수돗물이 대부분이지만, 옛날에는 우물대신 「작두샘」은 마중물을 넣고 손으로 작두처럼 아래위를 눌러 물을 퍼 올리던 수동펌프이다. 고시인은 이 작두샘에서 농사일에 지친 아버지께 시원스레 등목해주던 추억을 담았다.
어릴 적 마당 한 귀퉁이 작두샘/ 따사로운 한여름 논밭 일에 지쳐/
집에 오신 아빠의 등목을 해드린다//
작두샘 몸통에 물 한 바가지 붓고/ 축 늘어진 기다란 손잡이 꼭 쥐어/
열심히 펌프질하면 콸콸 쏟아진다//
전기가 없던 시절 동네 언저리에/ 큰 우물 대신 몇 집 안 되는 작두샘/
물줄기 끌어올려 샘물이 넘쳐나고/ 아빠 등목에 물을 끼얹으면/
시원하시다 물방울을 튕기실 때/ 한겨울 물보다 더 차가워 소스라친다//
- 「작두샘」 일부
[3] 살아가는 이야기, 일상의 ‘소확행’ 행복론
고시인의 작품 중 고향 추억에 이어 주류를 이루는 것이 일상의 잔잔한 행복론이다. 「혼차」 「벤치에 핀 설화雪花」 「뒤안길 웃음」 「보랏빛 사랑」 「하얀 소재 첫눈」 등이다. 그중 몇 편을 살펴본다.
약속 장소로 향한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커피 향 가득한 카페가 있어서/ 출입문 살짝 열고 들어간다//
혼자 마시는 페퍼민트 허브차/ 낮게 내려앉은 둥글고 하얀 도자기 컵/
맑은 물속에 띄운 티백 하나/ 은은하게 우려 나오는 연둣빛 차 맛은/ 내 몸을 녹인다//
입안에 차 물 머금어 음미한다/ 향기로운 차,/ 갈증 해소되는 시원함은/
한 줄기 폭포수 되어/ 내 마른 가슴에 물보라 친다//
-「혼차」일부
‘혼차’는 ‘혼밥’이나 ‘혼술’처럼 우리의 소소한 일상 중의 하나인 차 마시기이다. 강바람 차가운 2월 어느 날 약속 시간에 너무 이르게 도착하자 시간을 맟추려 멋진 찻집에서 차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을 담았다. 차 한잔의 작은 즐거움이다.
15개월 된 아가가 걷는다/... 15개월 된 아가가 춤을 춘다.../
15개월 된 아가가 방긋 웃는다/ 아빠도 엄마도 따라서 웃고/
아기의 작은 엉덩이 흔들흔들, 환한 미소를/ 가슴 가득 담는다
- 「아가의 성장기」 일부
인간의 일생 중 큰 즐거움의 하나는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커가는 모습일 것이다. 특히 아가 때의 귀여움과 재롱은 온갖 시름을 잊게 한다. 소소하지만 크고 행복한 동심의 순간들이다.
60대 가장의 반란이 시작되네/ 몸과 마음 정신은 항상 그대로인데/
모든 생각들은 현실에 휘감기고/ 심신들은 나태해져 예전 같지 않은지/
자꾸 이런저런 생각에 약해지고/ 살아가는데 재미가 없다 하고/
옆에서 혼자 지켜보는 게 힘드네//
- 「60대 삶의 반항」 1연
그런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위의 작품처럼 직장을 은퇴하고 노년에 가족과 부대끼며 소외감을 느끼는 우리나라 가장에 대한, 안쓰러움이 있다. 한국의 노인 문제의 실상이다. 다음 작품 「또 다른 나의 정체성」에서는 고시인이 시낭송가로서 열심히 준비하여 낭송하는 순간의 기쁨과 자부심을 피력하고 있다. 최근 급속한 시낭송 붐에 따라 늘어나는 낭송가는 시 작품의 전령사들로서 그 역할 또한 소중하다.
지인으로부터/ 행사에 초대되고 아침부터 분주하다/ 어떤 스타일로 폼 나게 꾸밀까.../
이래저래 한껏 뽐내고.../ 큰 거울 앞에 자랑하듯 서 본다//
사람은 꾸밈과 동시에/ 옷맵시까지 갖추고 보면 한결 아름다워져/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로 변신한/ 화려함이 정말 멋져 보인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을/ 한알 한알 보석처럼 밝게 표출하며/
살리라 다짐해 본다//
- 「또 다른 나의 정체성」 일부
고시인은 작품을 통해 일상 곳곳에서 〈소확행〉을 느끼는 〈행복의 전령사〉 역할을 자임하는 듯하다. 「행복 바이러스」 「소망빛 행복빛 사랑빛」 「행복의 열쇠」 「삶의 선물 행복」 등 ‘행복’을 직접 주제로 쓴 시들이 말해준다. 가장 못산다는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 등이 국민행복 지수가 높다고 한다. 이에 반해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단군 이래 가장 잘 산다는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며, 자살률이 세계 으뜸이라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리 그래도 행불행은 결국 ‘일체유심조’로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본다. 고시인의 행복론을 살펴본다.
아기 때 즐긴 즐거움은/ 모르는 즐거움이라/ 입가에 머물다 스치는/ 환한 미소 머물게 하네//
어른이 되어 즐긴 즐거움은/ 알아가는 즐거움이라/ 한 번씩 위로 툭 튕겨 나오는/
미소를 즐기네//...//
내가 즐긴 즐거움은/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네가 나로 인해 행복해할 때면/
모두는 행복하다네//
이대로라면 즐거움 속에 피어/ 누군가 내 삶에 아픔 준다 해도/
즐기는 즐거움은 가실 줄 모르는데/ 나 행복해도 될까요?//
-「행복 바이러스」 전문
이 작품에서 아기 때의 즐거움은 뭔지도 모르는 본능적인 즐거움이며, “어른의 즐거움은 뭔가 알아가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즐거우면 나는 미소가 절로 나고, 기분이 날아갈 듯 행복하다. 내가 행복해 네가 행복하고, 그로 인해 모두가 행복하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고시인은 “즐거움이 가실 줄 모르니, 나 행복해도 될까요?” 하고 반문한다. 고시인의 행복론을 좀 더 살펴본다.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무거운 짐/ 내려놓고 하나하나 풀어헤치고/
사랑이란 아름다운 시간 속에/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네//...//
사랑의 자물통 찾아 행복의 열쇠를/ 맞추어 주면/
온 세상 다 가진 듯 기쁨 되어/ 강물 따라 흐르는 인생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목에 서 있네//
어느새 찾아든 자물통 행복의 열쇠/ 용광로처럼 뜨거운 빛이 타오르면/
넘치고 흘러 서로의 마음 감싸 안고/ 웃음보따리 움켜쥐고 앉아 있다네//
-「행복의 열쇠」일부
고태화 시인의 소확행과 행복론은 다음 작품 「꽉 쥔 욕심 놓아주어라」로 귀결된다.
두 주먹 안에 열 가지 욕심을 가득 채운다/
살면서 커져 버린 욕심 한 가지 버리기 위해/
주먹 쥔 손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린다//...
태어나 몇십 년을 삶의 굴레 속에 담긴 욕심들/...
이제 다시금 버렸던 욕심 버리려/ 펼쳤던 손가락 다시 오므리고/
이제는 욕심이 아닌/ 용서와 관용과 배려와 봉사를 채워 나가야겠다//
-「꽉 쥔 욕심 놓아 주어라」일부
고태화 시인은 일생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두 주먹에 가득 쥔 욕심을 내려놓고 이제는 욕심이 아닌/ 용서와 관용과 배려와 봉사로 채워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긍정적인 인생관과 ‘청심과욕’의 실천 바로 그것이다.
[4] 마무리하면서
이상에서 고태화 시인의 제2시화집 『오선지 위에 휴식』의 작품세계를 첫째: 고향에 대한 추억의 편린들, 둘째: 살아가는 이야기, 일상의 ‘소확행’ 행복론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복잡한 문학 이론보다 작품 예를 들어 쉽게 풀어 보았으므로 더 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고태화 시인이 여러 작품에서 보인 ‘소확행’의 실천으로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문학에도 더욱 발전이 있기를 축원하며 평설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