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깊고 맑은 호수, 그곳에 갇힌 고대 인류의 정체는?
혹한의 추위로 조각된 한국인의 눈에서 세계를 횡단한 모험가의 유전자를 읽다
바이칼호.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담수호인 이곳은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미지의 바깥 세계로 담대한 여정을 떠났던 일군의 현생인류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이 인근 시베리아 지역에서 고립된 인류집단이 있었고, 그들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 인체의 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생존투쟁을 시작했다. 이 적응의 결과, 이들은 시간이 흘러 보온에 적합한 외양, 즉 작은 눈, 적은 체모, 뭉툭한 코, 두꺼운 허리와 작은 손발 등을 갖게 되었다. 이 집단의 일부는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다른 일부는 남하하여 동아시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큰 틀을 설명한 것이며, 남아시아 해안을 타고 북상한 사람들도 동북아시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동북아시아인의 유전자풀에 어떤 쪽이 더 주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이 시점까지도 의견이 무척 분분하나, 저자인 이어령 선생은 시베리아 가설을 택한다). 어쨌든 동아시아인들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한국인 외양의 ‘동아시아성’은 전연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애초에 사람이 피부색이나 콧대가 어떻게 생긴들, 그 생물학적 차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종이라는 익숙한 개념도 사실 유럽인들이 발명해 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지자면 오히려 여러 한국인의 얼굴은 혹한의 추위까지 뚫어내고 ‘생존’에 성공한, 일종의 인류적 ‘훈장’이다. 그것은 3킬로미터 이상은 걸을 엄두도 못 내는 다른 유인원들과는 달리, ‘나그네 원숭이’가 되어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시베리아의 동토까지의 수만 킬로미터를 주파한 ‘모험 유전자’의 증거다. 인류라는 캐릭터를 이보다 더 잘 상징하는 아이템이 있을까.
케이팝 아이돌들이 전지구적 인기를 누리고, 성형으로 한국인 같은 외모를 갖겠다는 서양인이 나오는 세상에서 정작 한국인들이 여전히 서구적 눈, 코를 원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서구를 향한, 여전한 문화적 선망을 의미하는 동시에, 실제로는 그 자체로는 별 의미랄 게 없는 얼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 실제로 Cosmetic(화장품, 성형술)의 어원은 ‘Cosmos’로, 질서와 조화를 의미한다. 문제는 어떤 질서와 조화일 것이냐다.
“그 눈 안에는 시베리아로부터 추위를 견디며
이곳까지 걸어온 한민족이 보입니다.
‘나’라는 개체와 수천 년 내려오는 우리 DNA 속의
한국인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입니다.”
‘한국의 대표 지성’ 고(故) 이어령이 인생 최후의 역작 ‘한국인 이야기’에서 일관되게 펴는 논지는 그 일곱 번째인 이 책,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무한한 자연의 질서(퓌시스)는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그 유효기간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제도(노모스)는 자연 앞에서 자신의 강력함을 주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과 같은 얼굴을 가지고 싶다고 밤마다 소원을 빌어도 세상이 들어 주지 않았고, 그날따라 메이크업이 무척 잘 먹은 날에도 화장은 결국 지워야 했던 것이다.
셸리의 유명한 시 〈오지만디아스〉가 묘사하는 것처럼. 인간의 권세는 세월의 모래바람에 휩쓸려 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존재를 계승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DNA로 이어지는 존재 계승의 산증인들이다. 태초의 단세포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 년에 걸쳐, 자연계의 낮은 확률을 뚫고, 그 조상들이 모두 번식과 양육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들은 위대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런 생물의 유전 역시 과학적 법칙의 속박 아래 놓여 있으며, 퓌시스의 끊임없는 변덕 아래 복종하고 있다.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는 퓌시스와 노모스의 경계를 종횡하는 기호·상징계, 즉 세미오시스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연작이다. 또는 문화와 예술의 독자성에 대한 기대라고 말해도 좋겠다. 인간의 문화적 소산 역시 DNA처럼 자신을 복제하고, 때로 변이하며, 다른 밈들과 경쟁하는 과정을 거쳐 ‘유전’된다(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런 ‘문화유전자’를 ‘밈’(Meme)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런 세미오시스의 계승과 발전이 후기 이어령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백조의 노래’나 ‘수구초심’이라는 우화에서처럼, 사람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삶과 ‘고향’의 존재를 돌이켜보게 된다. 이어령의 스완송인 ‘한국인 이야기’는 흔한 회고록이나 자서전과는 달리, 되짚음의 대상을 한국인의 언어와 문화 전체로 확장한 대작이다.
그렇다면 이어령이 말하는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계승받은 것, 그리고 (그중에서) 계승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어령에게 한국문화의 정수란 ‘생명’이다. 한국인들의 태교에서, 젓가락에서, 또는 일제강점기의 유년기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한국인의 얼굴에서 이어령이 보려고 하는 것도 역시 그 생명의 눈물, 생명의 눈빛이다. 오직 그것만이 화장이나 성형을 뛰어넘어 영속적이며 자연의 무정함과 대결해 살아남는다.
조선대의 심청전이나 근대의 신파극들로 미루어 알 수 있듯, 한국인들은 눈물로 소통하는 민족이었다. 눈빛은 또 어떤가.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라”라는 말을 건넨 것이나, 한국인이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고전인 맹자에서 ‘진실을 알고 싶으면 눈을 보라’라는 금언을 2024년의 우리는 계승하고 있다. 나쁜 시절에도 내면의 의지를 잃지 않았던, 한국인의 정신에 면면히 흐르는 기백을 눈빛에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