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교회 이면에 가려진 내밀한 돈 이야기.
교회는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곳, 연약한 자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기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곳.
그렇기에 교회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승배기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묻게 한다. 인간의 욕심이 얽히면서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좌절과 슬픔, 고통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우상으로 볼 수 있는 "장승"이 서 있는 곳에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들어섰고, 그 땅에서 장승을 바라보며 위안 삼았던 이들은 이제 하나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와 성도들에게서 위로받으며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성해야 할 곳에 불순한 의도(돈을 목적으로)를 가지고 담임으로 부임한 목사 때문에 교회가 불법으로 매매되고 그 차익이 담임 목사와 거기에 협조한 이들에게 뿌려진다. 교회를 팔아서 개인 이득을 취할 수 없도록 촘촘하게 만들어진 교단의 법은 하나하나 바람에 꺾인 수수깡처럼 "이게 불법이 아니냐?" 하며 따지는 목소리는 철저하게 외면되고 무시당한다.
아무리 법을 잘 만들었다 한들 무엇할까, 인간의 욕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일 뿐이다. 〈소설 장승배기〉에서는 한 교회가 거짓과 탐욕으로 철저히 무너져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작가는 양의 탈을 쓴 목자들의 죄목 하나하나를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듯 아주 세밀하고 꼼꼼하게 그려내었다.
무엇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이 더 충격적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억장이 무너지는 탄식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욕심 앞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에겐 하나님과 예수를 외치는 성도들의 목소리는 그저 "귀찮고, 악쓰는 소리"일 뿐이다. 그것도 모자라 "신앙이 약하다"며 성도들을 힐난하고 도리어 "교회를 떠나라"고 다그친다.
이 소설을 쓴 신기식 작가는 목사다. 그런 그가 교단 내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설화했기에, 이 소설은 내부 고발이자 자기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분노와 원통함을 느끼며 읽어 가는 독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욕심에도 끝이 있고, 정의는 여전히 승리하며, 모두 타버려 재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것이다.
신앙도 양심도 모두 저버린 목사의 만행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묻는 피해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상담해 주던 소설 속 화신 같은 홍 목사는 남은 교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목사가 없는 교회를 만드세요"라고.
소설 속의 장승배기교회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더는 담임목사를 보내 달라고 구걸하지 않았다. 도리어 담임목사를 파송한다고 해도 거절했다. 어떤 목사가 감독이 내준 파송장을 가지고 와도 더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히려 총독을 허수아비같이 여겼다. 교권에 순종해야 한다는 관행을 배격했다. 부담금이나 선교비는 지출했지만, 강제로 목사를 파송해도 사례비를 일절 지출하지 않기로 했다. 교인이 원하지 않는 일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다 보니 장승배기교회에 오려는 목사가 없었다. 교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목사를 두고 교인을 통제해 왔다. 그러나 본당파는 헌금을 하는 교인으로서 더는 무시당하지 않았다. 교권에도 끌려다니지 않았다. 장로가 되려는 교인이 없으니 교인 사이에 괜한 서열이나 계층 갈등도 없어졌다. 누가 누구를 지시하고 강제할 일도 사라졌다. 철저하게 교인 중심의 교회가 된 것이다."
소설은 좀 더 뒷이야기를 이어가지만, 목사가 없는 교회를 더 교회다운 교회로 그린 작가의 생각을 만나고 나니 어쩌면 꿈만 같은 그런 교회의 모습이 정말 지금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