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예암(豫菴) 하우현(河友賢, 1768∼1799)은 진주 사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강중(康仲), 호는 예암(豫菴)이다. 수곡면 사곡 마을에 진양 하씨 터전을 처음 잡았던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하우현의 학통은 남명학을 계승하며 가학으로 이어진다. 그 계보는 하항(河沆, 1538∼1590)에서 시작해 하겸진(河謙鎭, 1870∼1946)까지 이른다. 《예암집(豫菴集)》은 하우현의 시와 산문을 엮어 1902년에 현손 하영수가 편집 간행한 시문집이다. 문집의 내용은 5권 2책 목판본이며, 권1은 78제 129수, 권2는 소(疏) 1편, 서(書) 13편, 서(序) 2편, 기(記) 2편, 권3은 잡저(雜著) 11편, 권4는 잡저 1편, 제문(祭文) 2편, 애사 2편, 상량문 1편, 권5는 부록으로 행장, 묘표, 묘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암 시집》은 문집에 수록된 작품 중 하우현의 시 77제 128수를 수록했다. 당시 지역 고전 지식인이 갖고 있던 학업의 의미와 고뇌, 젊은 지식인의 삶의 방향을 반추할 수 있는 자료다.
하우현은 8세에 소학을 시작으로 10세 때 《논어》 《맹자》의 대의에 통달했으며, 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당시 동학들이 다들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자인했다. 하우현은 과거를 위해 공부하다가 문득 “천지 사이에 나서 성현의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곧 천지와 서로 나란하게 화육(化育)에 참여할 수는 없을 것이리라. 나는 이제 오늘 용력할 곳을 찾았다”라고 말한 뒤, 발분해 과거 공부는 그만두고 먹을 것도 잊은 채 성리학 책을 가져다가 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주학자들의 공부 방법을 따라 하면서, 치지(致知)를 학문의 요체로 삼고 이를 위해 항상 마음속에 경(敬)을 간직하고자 했다.
그는 성현이든 자신이든 인성은 다르지 않지만 기질의 차이로 우매함과 명철함이 나뉘게 되므로 지속적 성찰을 통해 성현의 경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을 사(士)로 의식하면서 학문과 뜻을 곧추세우려고 노력했고, 특히 친구들과의 도학적 교유를 통해서 고적한 자존감을 다져 나갔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도학에 대한 지속적인 경서 학습을 수행했다. 그 결과 《중용》의 경(敬)에 근원을 둔 것으로 보이는 지경(持敬)을 자신의 삶의 태도로 갖추었다. 《예암 시집》에 따르면, 하우현은 경학을 통한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경학 자체를 위한 공부도 또한 추구하지 않았다. 그에게 경학은 자신의 삶을 벼리는 기준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