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서 배 띄우고 노닐다
강에 배를 띄우고 무리 지어 노닐며 시를 짓거나 유락하는 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무왕이 궁녀를 데리고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에도 왕이 서경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를 수창하고, 임진현 강변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용화산하동범록〉은 함안의 용화산 아래에서 함께 배를 타고 노닐었던 이들을 기록한 것이다. 영남학파의 두 거두,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은 한강 정구(鄭逑)는 1607년, 과거 군수로 있었던 함안을 찾아와 여헌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의 정사에서 묵었는데, 대학자와 의병장으로 명성 높았던 세 사람이 한자리에 있다는 소식에 인근 각지의 선비들이 함께 모였다. 이들은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용화산 아래 계곡을 따라 노닐며 시를 읊고 정담을 나누었다. 이때 정구가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기록하도록 했으니 바로 〈용화산하동범록〉이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읊조리고 돌아오다
‘풍영(諷詠)’이라는 말은 《논어》 〈선진〉 편에 나오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에서 유래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뜻을 물었을 때, 증점이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며 읊조리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감탄하며 “나는 점과 함께하겠다”라고 했다. 선현들은 공자와 증점의 이 같은 경지를 본받고자 경치가 좋은 곳에 나아가 바람을 쐬며 심사를 읊고, 그곳을 ‘풍영대’라 일컫곤 했다. 대구 현풍에도 풍영대가 있었는데, 1634년, 현풍현감 김세렴이 뜻을 같이하는 젊은 선비들과 함께 풍영대에 올라 바람 쐬며 시를 읊어 호연지기를 기르고, 참여한 이들의 명단을 돌에 새겼다. 이른바 〈풍영대제명석각〉이다.
시를 묶어 선현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정성을 부치다
1927년, 자고당(紫皐堂) 박상절(朴尙節)은 〈용화산하동범록〉의 초고를 갈무리한 간송당 조임도(趙任道)의 현손인 조홍엽(趙弘燁)을 통해 이 기록을 보고 증조부 박진영이 이 모임에 참석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박상절은 이 짧은 기록과 서문에 더해 당시 선유에 참석한 사람의 행적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 추가했고 행적이 불분명했던 두 사람의 내력을 확정한다. 또 당시 선유의 모습을 여덟 장의 그림으로 새겨 더욱 실감 나게 했으며, 그림마다 5언시를 붙여 감흥을 더했다.
또한 풍영대 각석을 통해 조부 박형룡이 김세렴을 중심으로 한 현풍 풍영대 모임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박상절은 〈용화산하동범록〉 아래에 〈풍영대제명석각도(風詠臺題名石刻圖)〉를 그려서 붙이고, 또 〈풍영대술고시(風詠臺述古詩)〉를 서문과 함께 수록했다. 이어 현풍 풍영대의 돌에 새겨진 사람들의 행적을 찾아 〈풍영제현행략〉이라는 이름 아래 서술했다. 이 두 편의 글을 엮어 제목을 《기락편방(沂洛編芳)》이라 했으니,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자 했던 풍영대의 고사와 낙동강 가에서 함께 뱃놀이했던 일에 착안한 것이었다.
놀이 문화의 재발견
《기락편방》에 실린 제현록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간 조상의 행적을 만날 수 있다. 또 〈용화산수도(龍華山水圖)〉 및 서발문의 여러 기록을 통해 유서 깊은 장소를 상상해 볼 수 있고 직접 찾아가 그때 그 자리를 눈에 담아 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선현이 추구했던 놀이의 의미(풍류)와 삶의 의미[수신(修身)]를 되새길 수 있으며, 여기서 얻은 깨달음을 우리 삶에 적용하고 또 지금보다 나은 삶을 고민하고 실천할 수도 있다. 《기락편방》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삶을 새롭게 재구하는 창의적 상상력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