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근대 유학자의 기록
엄명섭은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를 살았던 유학자다. 젊은 시절 장병회(張秉晦)를 사사한 후 금산서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일본의 서당 교육 금지 정책에 따라 경찰서 호출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최병심(崔秉心)과 사제의 연을 맺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우학파의 맥을 이었다. 또한 곡성, 장수, 전주 등 전라북도 일대에서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유학을 잇는 스승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훗날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해 자신의 글을 각종 문체별로 손수 적어 정리했는데, 바로 이 책의 저본이 되는 《경와사고(敬窩私稿)》다. 6권 2책의 필사본으로, 권1에는 시(詩) 748제(題) 805수(首)가 수록되었으며, 권2와 권3에는 편지글이, 권4는 잡저(雜著), 서(序), 기(記), 제발(題跋), 명(銘), 고축(告祝), 제문(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9편의 비(碑), 36편의 묘갈명(墓碣銘), 1편의 묘지(墓地), 31편의 묘표(墓標)가 수록되었고, 권6은 묘표(墓標) 6편, 행장(行狀) 11편, 행록(行錄) 5편, 전(傳) 7편이 수록되어 있다.
경와 시의 특징
《경와사고》 권1에 수록된 시(詩) 가운데 오언 절구(五言絶句)는 5제 6수, 오언 율시(五言律詩)는 2제 3수, 칠언 절구(七言絶句)는 479제 529수, 칠언 율시(七言律詩)는 262제 267수다. 차운시(次韻詩)를 비롯해 자식이나 손주, 그리고 지인에게 보낸 증시(贈詩)가 있으며, 무엇보다 사물을 관찰하며 쓴 관물시(觀物詩), 즉석에서의 심회를 드러냈던 즉사시(卽事詩)가 적지 않게 보인다. 아울러 6·25 동란이나 광복절 같은 역사의 굵직한 사건을 노래한 것도 보이며, 근현대 들어 새로운 문물, 여행 등에 대해 읊은 작품도 산재한다. 《경와 시선》은 800수가 넘는 방대한 한시 가운데 127제 157수를 가려 뽑아 옮긴 것이다. 자연에 대한 남다른 시선을 보인 작품,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을 드러낸 작품, 공간적 배치와 시어의 안배가 뛰어난 작품 등을 중점적으로 옮겼다. 방대한 분량의 한시와 다양한 주제를 통해 근현대 한문학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와 문화, 유학자로서의 모습 및 가치관 등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