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언 작가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는 시베리아이다. 정확하게는 각자의 사연을 품고 시베리아로 떠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닿은 시베리아에서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만난다.
이번 소설집에 첫 작품으로 실린 「한 뼘」에는 ‘우주의 날’을 상기시키는 카르쉬라는 친구가 나온다. 이날은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지구를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인공은 방이나 아파트, 동네나 도시, 국가나 세계로 구획되는 어떤 경계를 의식하면 공황에 빠지는 사람이다. 마치 열을 가하면 통통 튀고 서로 부딪치면서 아비규환으로 빛을 내는 진공관 속 같다고 생각한다. 알타이 말로 ‘카르쉬’라는 이름은 ‘한 뼘’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에서 기인한 연상작용으로 주인공은 늘 한 뼘이 부족했던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한 뼘의 점수가 모자라 떨어진 대학입시나 한 뼘 뒤늦게 받은 학위로 무산된 교수 임용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한 뼘의 공간이 부족해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가구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한 뼘을 한탄하던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우연히 본 어떤 다큐멘터리 영상에 홀려 시베리아의 민속곡 ‘카이’를 듣고자 먼 알타이로 향한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카르쉬였다. 그러나 ‘카이’를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만난 남자는 영 미덥지 못한 사람이었다. 즉 카르쉬 역시 어찌보면 한 뼘 부족한 사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은 결국 남자가 부르는 ‘카이’를 듣고 만다.
한 뼘이 모자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향하는 이야기는 두번째 작품 「시베리아, 그 거짓말」에도 등장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호구지책으로 얼떨결에 시베리아에 대한 강의를 맡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을 자료만 조사해서 강의를 시작한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시베리아 강의였지만, 그곳에는 장밋빛 미래가 있을 거라고 자기계발서에 담기는 논리처럼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없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강생 ‘시제로’ 때문에 주인공의 확신은 무너진다. 과거 강사였던 주인공에게서 ‘C°’ 학점을 받아 ‘시제로’로 지칭되는 이 인물이 주인공의 위선을 공격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주인공은 자신이 강의했던 혹은 사회에서 자기계발서처럼 주입하던 시베리아가 거짓이라고 느낀다. 우리 사회에서 위정자 혹은 기업가들이 자기계발서처럼 외치던 한반도에서 시베리아로 연결되는 열차 사업은 결국 필요에 의해 동원된 위선의 언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수록된 「북 치는 소년」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약간의 장애를 가진 친구에 대한 회상기인데, 고아인 이 친구는 번쩍이는 악기를 특출나게 다루지도 못했고 후원자의 눈에 띄어 입양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찔찔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친구나 실직을 한 상태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주인공 역시 한 뼘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렇게 뭔가를 결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음 작품인 「그날이 오면」에서도 이어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경제적 형편으로 지방 도시의 구도심에 위치한 ‘13번지’ 낡은 주택의 이층으로 이사온다. 지하에는 다른 세입자가, 그리고 일층에는 주인집 부부가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집 건너편에 위치한 고물상 ‘창대자원’에서 밤낮 없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창대자원이 내뱉는 소음으로 인해 주인공의 평온한 삶은 점점 무너지는데, 이는 주인공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다. ‘자원의 틈새에서 나는 점차 13호 구성원들을 자원의 차원으로 살피기 시작’하며 ‘나는 창대해지리라. 나도 버젓이 사회에 유용한 자원이 되어 창대해지리라. 당당히 이곳을 벗어나리라’라고 다짐하는 주인공은 마치 「시베리아, 그 거짓말」에서 한반도 철도가 시베리아 철도로 연결되면 어떤 경제적 가치가 있을지에 대해 시험문제를 내는 강사와 같다.
다음 작품 「축약시대」에는 수십 년 만에 연락해 과거 억울한 죄에 대한 탄원서를 부탁하는 P와의 사연이 소개된다. 주인공은 썩 내키지 않는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탄원서 작성을 위해서 P의 삶을 축약한다. 주인공은 오래전에 P가 살고 있던 C시에 내려가 한동안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안다’라는 말을 강박적으로 되풀이 토해하는 P의 어머니를 보게 되고, 그 말의 기원을 추리한 적이 있다. 여러 변이형을 가진 ‘안다’는 ‘언더’나 ‘원더’로 들리기도 한다. 주인공을 갸웃하게 만드는 ‘오란다’ 혹은 ‘오런더’라는 말도 있다. 듣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이런 혼란은 “혀끝에서 벌어지는 힘의 역학 관계로 파악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P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이어진다. P의 삶을 망가뜨렸던 이러한 언어의 혼란은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조용환 약전(趙龍煥 略傳)」을 쓰다」에는 얼떨결에 지방 소도시를 빛낼 숨은 영웅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사연이 소개된다. 주인공은 시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필진으로 그동안을 알려지지 않았으나 쇠락해가는 시를 빛낼 영웅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게 된다. 고심하던 그의 눈에 우연히 『수암의 기이한 천성 견문 경험기』란 책이 들어오고 그는 책에 에피소드로 수록된 ‘도술가 조용환’에 대해 주목한다. 그런데 애써 조사해봐도 이 기묘한 도술가는 한 뼘 부족한 사람이다.
「골로먄카에 대한 상상」에는 바이칼 호수 깊은 곳에 사는 물고기가 나온다. 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외형에 지나친 기름기 때문에 맛도 없는 골로먄카라는 물고기다. 주인공은 국내에서 시베리아에 대한 강의를 하며 틈틈이 여행사의 현지 가이드를 하는 것으로 부업을 삼고 있는데 어느 날 예전 여행에서 만난 여자에게서 연락이 온다. 그런데 처음 전화를 잘 받아주었던 주인공에게 여자는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용건도 분명치 않은 자신의 얘기를 되풀이한다. ‘위험 박순남’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여행 내내 속 보이는 언행으로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쳤던 여자야말로 골로먄카 같은 사람이었다. 그 여행에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골로먄카를 보는데 그 어원이 ‘헐벗은 또는 가난하다는 뜻’을 가진 ‘골로이’가 아니라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이란 뜻의 러시아 고어 ‘골로멘’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 단편 「아프리카」는 시베리아 한복판의 투바공화국의 키질이라는 곳에서 아프리카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살아온 온다르 칄긔츼라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젊은 시절 배우로 활동한 남자는 체호프 원작인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에서도 자주 배역을 맡았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지도를 평생 곁에 걸어두고 살아왔다. 그리고 ‘카이’라고도 부르는 ‘호메이’를 듣기 위해 시베리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키질을 찾아온 주인공에게 오히려 바냐의 아프리카를 아냐고 되묻는다. 남자는 한국에 유학을 간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들이 죽지만 않았어도 다시는 아프리카를 꿈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내면에 부족한 뭔가를 채우기 위해 호메이를 듣고자 키질에 온 한국인 주인공이나 자신에게 결여된 무언가 때문에 평생 바냐의 아프리카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온 시베리아의 남자 모두 한 뼘 부족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