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 출간으로부터 13년, 이번에는 전각을 주제로 박원규 작가와 김정환 서예평론가가 이야기를 나눈다. 박원규 작가를 매혹시킨 인장의 매력과 의미에서 시작해 전각예술의 역사와 뿌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들, 그들이 뽐낸 미학과 성취, 전각의 형식과 실기까지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았다.
문학과 회화, 조각을 하나로 모은 동양예술의 진수지만 조용히 퇴색해가는 전각예술. 서예가이자 전각가로 수많은 명인에게 사사하며 한국의 전통 예술 한길을 걸어온 박원규 작가가 전각에 담긴 의미와 아름다움을 펼쳐놓는다.
■흑백의 예술로부터 뻗어나온 주백의 예술, 전각
“인장은 글씨로부터 시작하고, 인장의 품격은 글씨로부터 나온다”(以書入印 印從書出)는 말이 있습니다. 전각을 배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서예가 그 기본이 된다는 뜻이지요. 제가 이 대담을 통하여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흔히 보는 계약서나 서예 작품 한 귀퉁이에 말없이 찍혀 있는 도장은 실용성에서도 예술로서도 점차 주변화되어가는 것 같다. 갑골문에서 출발한 전서(篆書)가 서예라는 흑백의 예술을 넘어 주백(朱白)의 예술로서 자리 잡은 동양예술의 진수, 전각의 전통을 이어온 사람이 바로 하석 박원규 작가다.
명동 중국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대만 전각가들의 작품집을 보고 감동받은 박원규 작가는 대만으로 유학가 3년간 이대목 작가에게 전각 수업을 받았다. 이후 박원규 작가는 반세기 동안 서예와 전각을 갈고닦으며 동양예술 한길을 걸어왔다.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는 2023년 염한(붓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씀) 60년을 맞은 박원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대담자 김정환 서예평론가와 여러 제자가 의기투합해 펴낸 책이다. 2010년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의 출간 이후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아라아트센터와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등에서 주최하는 여러 기획전에 참여한 박원규 작가의 근황과 작품들을 되돌아보면서, 김정환 서예평론가가 묻고 박원규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전각이 품은 매력을 소개한다.
■실용품에서 종합예술로
인장은 실용에서 미학으로 그 의미가 점차 변화해왔다. 한나라와 진나라 시절에는 인장을 소유하는 것이 관직을 맡음을 의미했고, 원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인장은 주물로 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명나라 때 칼로 깎아낼 수 있는 돌, 화유석이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이 전각을 새기고 인장을 소유해 서예 작품과 책에 찍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고상하고 세련된 문인아사의 취미로서 붓은 전각도로, 종이는 화유석으로, 시와 도화는 인면과 구관으로, 조각은 뉴로 화하면서 전각은 동양예술의 최고봉에 올랐다.
종합예술로서의 전각은 그저 전각도를 잘 다룬다고 대성할 수 있는 손기술이 아니다. 박원규 작가는 칼을 다루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한문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점과 선을 배치하는 공간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투른 한문 실력으로 잘못된 글자를 썼다가는 오래도록 망신을 당하는 수가 있고, 공간 구상이 치밀하지 못하면 조형미가 사라져 작품 구상에서부터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동양적 미의 형식을 끊임없이 흡수하고 발전시켜온 전각예술이기에, 칼 다루기만 전문으로 연습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사를 가지는 것이 상승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라’는 동양 고전의 가르침과 한 치의 다름도 없다.
■전각 수련자를 위한 최고의 안내서
총 12장으로 이루어진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에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책장을 넘기며 그 정체를 알고 나면 전각의 웅장한 역사와 매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주를 묻히지 않는 면에 인장이 품은 사연을 새기는 구관(具款)은 그 자체로 시이자 수필로 문예의 영역에 속한다. 손잡이 부분에 각종 조각을 새겨넣는 뉴(紐)는 다양한 자연물과 동물을 묘사하는 동양의 입체적 조형미술을 보여준다. 각종 전각을 탁본해 기록한 인보(印譜)는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기록문헌이자 전통적인 미술 도록으로서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한국에도 헌종과 고종 때 왕실 인장 등을 모아 펴낸 『보소당인존』이나 추사 김정희의 인장을 모은 『완당인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편찬한 『근역인수』 등 다양한 인보가 제작되어 전해오고 있다.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에서는 역사상 손꼽히는 인보들과 전각을 모방해 연습하기 좋은 작품을 실은 인보를 소개한다.
전각을 제작하는 재료와 공구에 대한 설명도 빼놓을 수 없다. 박원규 작가는 좋은 전각도의 재질과 크기, 칼날의 각도까지 모든 지식을 숨김없이 밝힌다. 전각을 새기는 화유석의 종류와 특성, 산지와 명칭을 나열하고 사진으로 비교해 보여준다. 인니(印泥)는 흔히 인주라고 부르는데, 쑥의 솜털과 주사(朱砂)를 피마자유 등과 섞어 만드는 질 좋은 인니는 인장에 내구성과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인니를 보관하는 방법과 뒤섞는 방법, 인니를 보관하는 통과 뒤섞을 때 사용하는 주걱인 인저(印筯)의 재료까지, 심지어는 돌을 갈아내고 털어내는 데 필요한 붓과 솔, 유리판까지 공들여 설명한다. 더불어 전각 작업의 순서와 탁본 방법까지 안내하니 전각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담은 ‘올 인 원’ 입문서인 셈이다.
인감 제도나 최근 대두되는 캘리그라피의 전각 문화를 비롯해 인장은 여전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 사람을 대표하는 애장품이다. 대담자 김정환은 박원규 작가가 품은 예술관과 지식과 지금까지의 작업을 담은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를 통해 전각에 대한 열정과 애정, 생생한 감각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누구든 학교에서나 그밖의 장소에서라도 지우개나 비누,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생생한 감각을 느껴보시기를.
“나는 ‘고전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존심을 갖고 작가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작업을 할 수 있었지요.
이러한 마음자세로 서예작업을 하다 보니 서예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는 2010년 2월부터 4월까지 두 달 동안 총 12회에 걸쳐 서예가 박원규와 서예평론가 김정환이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그들은 작가의 작품 세계, 서예의 개념, 서예미학·문자학·한학, 중국과 한국의 서예사와 서예가 등 서예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을 쌓은 스승과 친구, 취미생활까지 폭넓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어쩌면 주류 예술이 아니기에 대중의 외면을 받았던 서예를 다시 대중화할 수 있는 작가이자, 누구보다 진지하게 40년 동안 서예에 천착하며 한길만을 걸어온 하석 박원규의 삶과 작품을 통해 우리는 한 작가의 치열한 인생철학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점차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전통예술인 서예의 매력에 다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전통 서예의 형식을 깨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한 단계 수준을 끌어올리다
하석 박원규의 작품은 일반적인 서예작품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 작품들은 마치 현대 회화를 보는 듯한 신선함을 제공한다. 특히 고대 문자인 갑골문과 금문으로 쓴 작품들은 주로 형상화해서 표현하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독창적인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서도 용(龍), 구(龜) 등의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살펴볼 수 있다.
“글씨는 쓰는 것이에요. 붓을 잡고, 자연스럽게 거침없이 쓰는 게 중요합니다. 쓰는 법보다는 다양한 운필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은 결국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조화의 문제입니다.”
그가 말하는 서예란 흑백의 예술이다. 동양예술은 선적이며 추상적인 경향이 강한데, 선은 문자의 조형성과 필호(筆毫)의 작용으로 생긴다. 여기에는 골(骨)이 있는가 하면 근(筋)도 있고, 육(肉)과 혈(血)도 있다. 그래서 글씨를 볼 때 생명의 기운과 감동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선은 무한의 공간인 백(白)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추상성을 자아낸다. 이렇게 서예는 문학성과 추상성을 함께 지닌 흑백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서예는 시대성을 표현하는 예술로, 당시의 시대정신이 작품에 드러난다. 이에 따라서 시대양식도 생겨나게 되며, 예술가의 개성이 그 시대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고 말한다. 즉 시대성의 영향을 작가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이치다.
한편 그는 서예를 구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전각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다. 작품을 쓰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 찍어야 하는 전각은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돌이나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단순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칼로 쓰는 글씨’라고 말하는 그는 제대로 전각을 하기 위해 대만의 서예대가인 이대목 선생을 찾아가 직접 사사받기도 했다. 글씨를 쓸 때처럼 전각도 학문, 인품, 교양이 필요하며 공간구성에 대한 감각까지 갖춰야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학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론 없는 작품은 나올 수 없다는 확고한 예술가로서의 신념을 또 한 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어려움이나 곤경은 모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작품이 추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아직 진보하지 않아서 스스로 그 추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진보하면 할수록 이러한 발견 더욱 잦아집니다. 이러한 수준에 도달한다면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간 상태일것입니다.”
■끊임없이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서예가
서예가에게 꼭 필요한 한문 공부도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일주일에 세 번씩 한문 선생님을 따로 두고 공부하고 있다. 작가가 섭렵한 고전만 해도 ‘사서오경’을 비롯해 당시 300수, 『노자』 『장자』 『고문진보』 등 그 내용이 방대해 엄두를 낼 수 없는 경서 위주다. 그는 좋은 서예가가 되려면 가슴에 많은 글자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하며 옛 한자들을 따로 정리해놓은 메모들과 사전을 항상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고, 뜻을 찾아보고, 내용을 정리해둔다. 그러다보니 한문을 전공한 사람들도 모르는 옛 한자에 대해서도 자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문방사우’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다. 특히 좋은 벼루가 될 만한 판연(원석을 가공하지 않은 벼루)을 두고 일본인과 경합을 벌이다 결국 집을 팔면서까지 손에 넣게 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또한 영롱하며 오묘한 먹색을 내기 위해 먹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먹을 갈아서 쓰며 발묵에 용이하도록 먹을 하루 동안 재워두고 쓴다는 비법을 공개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관대하게, 작품을 대할 땐 엄격하게
하석 박원규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의 인품이 부드럽다고 이야기한다. 현대 서예에 한 획을 그은 작가인 만큼 명성이 높지만 자긍심이나 자존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겸손함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함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일자견심’(一字見心),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처럼 엄격하게 완성의 기준을 정하며, 타협을 거부하는 ‘외유내강’의 기운을 소유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이란 작가의 고뇌 속에서 나온 것이고, 단 한 작품을 통해서 작가로서 걸어온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다.
“서예를 하면 사람과의 만남이 더 격조 있게 변합니다. 중국에서는 교양인을 ‘독서인’이라고 부릅니다.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니 곧 교양인이라는 말이지요. 서예는 학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예술이에요. 즉, 책을 좋아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예술이지요.”
강암 송성용, 긍둔 송창, 월당 홍진표, 지산 장재한 선생 등 그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들의 이야기도 귀감할 만한 부분이다. 그에게 ‘사람을 귀하게 여겨라’ ‘예술가란 모름지기 가슴에 풍류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심어준 스승들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편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와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 대만의 유명한 서예가인 두충고 선생과 화교 출신의 친구 축진재 씨와 만나게 된 사연을 읽다보면 인간미 넘치는 작가의 참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취미 생활도 프로처럼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는 매일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작업실에 나와 한학 연구를 하거나 작품을 쓰고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지킨다. 자유분방한 자기 세계를 가진 예술가라면 당연히 불규칙한 일상을 보낼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는 작품뿐만 아니라 취미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다. 그는 전국고수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鼓手)이기도 하며, 체력 단련을 위해 20년 동안 꾸준히 수영을 한다. 웬만한 스튜디오 못지않은 기기를 갖추었다고 소문날 정도로 다수의 수동 카메라를 수집했고, 다양한 커피 맛을 섭렵하며 즐기다보니 결국 정통 기계로 뽑아 마시는 핸드드립 커피까지 손님에게 선사한다. 그야말로 취미도 서예처럼 최고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소홀히 여기지 않고 즐기는 다재다능한 능력자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길 소망한다
하석 박원규는 훗날 제자들이 그를 떠올릴 때, 책가방을 둘러메고 씩씩하게 공부하러 작업실로 향하는 모습을 생각하길 소망하며 작업실로 향하는 첫차에 오른다고 한다. 그동안 총 25권의 작품집을 펴냈고, 전문서예잡지 『까마』를 7년 동안 발행했으며,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여는 등 누구보다 활발히 한국 현대서예의 대중화에 앞장선 그는 소박한 인간미와 치열한 탐구열을 동시에 지닌 작가다. 마지막으로 그는 앞으로는 이름을 남길 만한 대작을 만드는 것과 서예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10년 전처럼 10년 후에도 변함없이 작업하고 공부하는 작가로 우리에게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