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쪽에 역시 작은 붓글씨로 석전 이영재라는 서명이 보였는데 석전이 묵은 밭이라는 뜻을 지녔다는 사실을 그날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으로 자처하며 살았던 아버지.
“법원 앞 건물하고 남평 땅은 강운이 몫으로 생각하고 있다. 네 형 연금은 나 죽으면 끊어지겠지. 요 십 년간 그 연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뒀으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세월이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뜻을 펴려면 돈도 있어야 했다. 이미 공증까지 마쳤다.”
총총한 정신으로 깔끔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던 아버지.
1년여 손자를 기다린 보람 없이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듬해 봄이 오기 전 세상을 떴다. 먼 곳에 있다면서 울먹이는 강운의 전화에 나는 잡히지 말라고만 했다. (「근대사연구초近代史硏究抄」 중에서)
푸르른 물이 흐르는 강, 그 강을 따라 이어지는 갈대밭과 파란 하늘이 이어지는 긴 둑, 형이 오랫동안 앉았던 그 자리에서 나는 맑은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
억새를 꽃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던가. 원색의 화려함을 갖추어야만 꽃이라고 여겼던 나에게 산과 들길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억새는 그냥 풀이었다. 봄날의 허기를 달래주던 풀도 아니었다. 여름에 그늘을 만들어 준 풀도 아니었다.
소도 피해가는 풀, 여린 듯 질긴 생명은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다가 화려한 꽃들이 시들고 말면 은빛 겨울 색으로 피어나 가을을 포근하게 하던 풀, 그 억새가 하얀 꽃으로 변할 무렵이면 가을이 깊어졌던 것을.
뒤늦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억새를 보며 나는 울었다. (「미망迷妄의 강」 중에서)
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고진감래라는 표현으로 부러워했다.
하지만 가끔 혼자만 들리는 가슴 밑바닥의 울림이 있었다. 내심 아내의 행태에 저항하면서도 안락과 여유로움에 안주해버린 현재 내 삶의 방식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또 가끔은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아내의 성화에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런 울림과 회의와 충동의 근원을 명조와 극락강을 헤맸던 시절 때문이라고 연결 짓지 않았다.
그날 이후에도 내 인생의 극적인 변화는 수없이 많았기에 그때 극락강의 만남과 현실을 연결 짓기 곤란하다고 무시해버렸다. 아내에게 내 추억을 말해주기보다는 단순히 경치가 좋은 곳으로 바람 쐬러 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은 가벼운 외출. (「그때 우리는 갈까마귀가 되어 날았다」 중에서)
일탈을 꿈꾸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 금기시되던 불륜이 드러난 사고!
구구하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
부부란 가장 본능적인 인간관계라고 부모와 자식처럼 원초적인 1차 관계는 아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쳐 맺어진 2차적인 관계, 그래서 부부 사이는 돌아서면 남이 되는 특수한 관계다.
모노가미는 최소한 인간 사회가 본능에 가까운 동물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최소한의 공동체이면서, 외견상 사회 질서를 유지 안정과 존속 가능한 제도라는 점에서 인류가 고안한 제도 중 탁월한 발명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일탈을 막을 목적으로 종교와 윤리를 창작하고 관습과 법으로 강제하고 다스렸으나 애욕을 쫓아 모노가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막을 수 있는 장치는 못되었다. 권력과 재산을 무기로 성적 방종을 합리화하려 했던 지배집단의 모습이나, 지고지순한 예술로 포장한 사랑의 도피도 그런 시도였을 것이다.
어쩌면 모노가미는 피지배집단 혹은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가치와 이념에서 출발한 이성적인 제도이며, 끊임없이 윤리 도덕과 법의 벽을 넘어 본능적 쾌락을 쫓는 사람들로부터 다른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계약관계일 수 있다. (「길 밖의 모노가미」 중에서)
“나는 시를 잘 모른다. 그러나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지난한 기다림의 산물이요, 칠흑의 동굴을 더듬어 가는 길의 끝에서 만난 빛이며 더러는 숨이 턱턱 멎을 준령을 넘어야 하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을 지나야 얻을 수 있는 천상의 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문학과 시를 모른다고 하면서도 시인의 길이 어둠 속에서 빛을 그려내는 험난함을 강조하는 아버지.
“사람은 어떤 면에서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존재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던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평생 가게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시가 무엇인지 그림 혹은 음악은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보고 들어도 알 수 없겠지. 다만 칠십 가까이 살았기에 삶이란 고통이면서 희열이라는 사실만 안다. 희노애락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만가지 형상이 될 것이고, 시로 쓴다면 수천억의 빛깔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머리에 쏟아지는 폭포였다. (「미도美道」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