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요지》의 저자 정약종과 그의 가문은 한국 그리스도교, 특히 천주교의 형성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779년 경기도 인근 남인(南人) 계열의 몇몇 양반 자제들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講學會)로 모여 18세기 후반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과 관련된 책들을 읽은 후,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에 입문했던 것이 한국 천주교 신앙의 기원이 되었다. 이는 외국의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생적인 신앙고백과 더불어 교회가 설립된 매우 드문 예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먼저 천주교에 입문했던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동생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뒤를 이어 정약종은 형제들보다 뒤늦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1787년 정미반회(丁未泮會, 반촌에서 서학을 공부하던 자들을 성토한 사건)와 1791년 진산 사건(제사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른 윤지충 사건) 이후 신해박해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이 천주교에 입교한 사실 때문에 정치적 유배를 당하자, 그의 형제들이 공식적으로 신앙을 저버렸던 것과 달리, 정약종은 철저하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주교요지》는 한국 사람이 저술한 최초의 천주교 한글 교리서이자 호교론적(護敎論的) 신학서이다. 정약종은 한문을 모르는 평민들에게 신앙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한글로 《주교요지》를 썼다. 당시 대부분의 책이 한문으로 쓰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천주교 교회의 최초 교리서가 한글로 쓰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중인, 농민, 아녀자 등 하층민들과 소외계층까지 포괄하여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가장 천대받던 천민마저도 차별 없이 형제로 대우하는 신앙의식의 발로였다. 어쩌면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주교요지》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 역시 이 책이 중국의 《성세추요》(盛世芻要)보다 나은 책이라 호평했다. 정약종 한 사람의 열정과 영성이 초기 100년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