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를 최대한 보고 읽고 공부했으며, 한국군 참전군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재 상태의 그들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쟁을 수행한 그곳, 그 마을에 찾아가 아직도 부서진 지체와 깨지고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며 생을 붙들고 있는 그곳 사람들을 만났다.”
작가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도 그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오래전 일이라고 제쳐놓고 있다가도 눈에 담기고 몸으로 겪었던 그날의 일들이 뜬금없는 상황에서 불쑥불쑥 재생”된다는 것. “그들의 몸 안에서 그 전쟁이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베트남어학과 대학원생인 ‘이나’가 시급이 꽤 높은 알바 자리를 소개받고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편의점이나 카페, 도서관 알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준다는 말에 솔깃해 찾아간 이나는 구자성이라는, 휠체어를 탄 노인과 만나 구술 기록 계약을 맺는다. 죽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려 한다는 구자성이 제시하는 계약 조건은 다소 황당하고 부담스럽다. 자신이 잘못돼 죽지 않는 한 중간에 그만둘 수 없고, 만일 중간에 그만두면 자신이 지불한 돈의 열 배를 물어야 하며, 구술한 내용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과 동남아 여행에 동행할 것 등이다.
그렇게 해서 구술 작업을 시작했지만 구자성의 입은 종종 닫히기 일쑤여서 이나는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그럼에도 지방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가이기도 한 이나는 구자성이라는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캐릭터에 대해 알고 싶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 돈을 많이 번 이야기, 결혼 사흘 만에 파경을 맞은 이야기, 그 뒤로 여러 여자를 만났다는 이야기 등을 토막토막 들려주던 구자성은 웬일인지 3주가 지나도록 입을 떼지 못한다. 인내심이 바닥나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이나가 그만두겠다고 통보하러 간 날, 구자성은 베트남 여행을 제안하며 추가 계약서를 내놓는다.
이나와 구자성, 그리고 그의 시중을 드는 김집사 세 사람이 같이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이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구자성이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다는 것. 다낭에 와서도 좀체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열흘째 되던 날, 호출한 택시 기사에게 “롱빈을 아시오?”라고 묻는다. 50년 전 한국군이 잠시 주둔했던 곳이라는 말에 이나는 그제야 구자성이 왜 베트남에 오자고 했는지 알게 된다.
소설은 그때부터 롱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진실과 함께 구자성의 의식과 무의식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앉아 그를 평생 괴롭혀 온 죄의식과 고통의 뿌리를 하나하나 드러낸다.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과 공공양심이 전쟁의 광기로 인해 어떻게 무너지고, 전쟁이 끝난 뒤에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어떻게 갉아먹는가를 선연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구자성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이자 전쟁의 맹목성과 잔혹성에 휩쓸린 피해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미군부대 앞에서 구두닦이 찍새를 하던 어린 시절 미군의 성추행을 일상적으로 당해야 했던 부끄러움과 분노가 내재돼 있다.
이나 역시 안온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 현재는 독립했지만 아빠의 일상적인 억압과 폭력을 받아내야 했던 시간들이 여전히 의식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구자성의 구술 작업을 하면서 이나는 자신이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격과 함께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받아내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구자성의 이야기 수렁 속으로 함께 한 발 한 발 걸어들어가 마침내 그의 몸 깊숙이 잠겨 있는 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작가는 “이 소설은 2020년 고인이 된 빈딘성 떠이빈(옛 빈안)의 응우옌 떤 런 아저씨와 꽝남성 퐁니 마을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를 비롯한 베트남 중부지방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증언, 김영만 선생을 비롯한 한국군 참전군인들의 이야기와 수기, 육성으로 증언하면서도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던 수많은 베트남전 한국군 참전자들이 토해 놓은 이야기와 삶이 바탕이 됐다”고 말한다. 현재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관련 국가배상소송에서 1심은 승소했으나 한국 정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전쟁의 맹목성과 광기가 인간을 집어삼킬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다. 나아가 그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상후스트레스로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인간에 내재된 악의 평범성뿐만 아니라 전쟁의 후과가 남기는 상처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한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가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