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중심성은 지역 다자 협력의 핵심 원칙이다
아세안은 세계 3위에 해당하는 6억 5천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세계 6위에 해당하는 GDP 3조 달러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는 지역 공동체다. 또한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 위치해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과거는 물론, 지금도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자주적으로 상호 협력하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중심축인 아세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아세안이 표방하는 주요 원칙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지만 그만큼 오해도 자주 받는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에 대해 새롭고 구체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아세안 중심성은 다자간 협력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세안이 해당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제, 과정, 절차, 원칙, 협력 및 용어, 분위기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개념입니다. 또한 아세안 의장국이 이런 다자간 구조에서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성과를 이해할 수 있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양자간 혹은 다자간 협력은 상호 존중과 상대 국가에 대한 주권 존중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7쪽) 즉, 아세안이 주도하는 원칙과 규범으로 형성된 아세안 중심성이 지역 다자 협력의 핵심 근간이라는 뜻이다.
남중국해 분쟁, 북라카인주 분쟁,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중요한 이슈들에서 아세안의 주도하에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는 아세안 고유의 문제 해결 방식인 ‘컨센서스(consensus)’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10개 회원국들의 엄청난 배경과 이해관계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세안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컨센서스라는 아세안 방식(ASEAN way) 덕분이라는 것이다. 가식적인 태도나 대립이 아니라 대화와 컨센서스에 중점을 두고 조용한 토론을 선호하며 강압적이거나 반대로 지나친 저자세 외교는 피하는 것이 바로 아세안 방식의 특징이다. “상호 존중과 이해, 즉 각 회원국이 서로의 상황과 어려움을 이해하는 방식이야말로 역내 평화와 안정은 물론, 아세안의 미래에 필수적인 요소”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저자는 2017년 아세안 상주대표위원회(CPR) 의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아세안의 역량으로 컨센서스에 도달할 수 있었던 사례로 남중국해, 불법·비보고·비규제어업, VX사린 화학작용제 등의 문제들을 자세히 소개한다. 베테랑 외교관이 유려한 스토리텔링으로 써내려간 경험담을 통해 아세안 역내외 국가들과의 논의,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대사회의, 그리고 동아시아 정상회의 의장성명 조율 과정 등 생생하고 내밀한 외교 현장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 발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위해
2024년은 한국과 아세안이 대화관계를 수립한 지 35주년이다. 1989년 관계 수립 이후 35년 동안 한국과 아세안은 전 분야에서 핵심적인 파트너가 되어왔다. 팬데믹 발생으로 교역이 소폭 감소한 후 2년 연속 사상 최대 규모의 교역(2021년 1,765억 달러, 2022년 2,074억 달러)을 갱신했고, 2022년 2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체결 및 한-아세안 FTA 업그레이드 추진을 통해 경제협력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복잡해지는 역내 정치 지형 속에서 아세안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2022년 대아세안 정책인 한-아세안 연대구상(KASI)을 발표하며 아세안과의 협력의 중요성을 분명히 했으며, 특히 2024년에는 한-아세안 관계를 아세안이 대화상대국과 맺는 최고 단계 파트너십인 포괄적전략적동반자관계(CSP)로 격상시킬 것을 제안했다.
“한국은 사회문화 분야에서 사람 중심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세안은 이를 위한 이상적 상대국, 혹은 협력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측면에서 아세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세안 중심성은 새롭고 실용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아세안과 관련된 모든 이해당사자나 국가들이 이 책을 통해 아세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깊게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아세안과의 관계를 최대한 이용하기를 권했습니다. (…) 이 책의 한국어판을 통해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 발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세계 평화와 번영, 그리고 국민의 존엄과 정체성 확립에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9쪽)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35주년을 맞아 출간된 『아세안 중심성』 한국어판은 저자가 여러 악기가 조화로운 음을 내도록 이끄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자신을 빗댄 것과 같이, 전통적인 양자 외교에서 벗어난 다채로운 아세안 다자 외교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아세안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개선하고 이해를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