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서정시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회상과 기억이라는 시의 질료에서 벗어나 이제 창작의 궤도에 본격적으로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른의 시간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어떤 어른은 그것을 길고 지루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세계로 건너가 말과 표현을 달리한다.
이처럼 김양희의 시는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상황을 사유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시인은 일찍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호혜적 연민의 시선과 오도된 욕망을 하나씩 허묾으로써 보다 나은 공존의 원리를 모색해 나간 바 있다. 타자의 고통을 연민하는 시선은 단순한 수사가 될 수 없다. 혹자의 지적처럼, 어둠은 그냥 어두운 것이 아니다. 캄캄한 것과 컴컴한 것이 다르고, 깜깜한 것과 껌껌한 것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고통과 부정은 ‘권능화(empowering)’이며, 여기엔 의지에 기인한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고 말한 이는 브라이언 마수미다. 마수미에게 고통과 희망은 본질적으로 유사하며 고통이 희망보다 더 발전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정적 순간, 즉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책 없는 희망감에 빠진 무력한 상태보다 나아서이다. 「세렝게티」를 읽어보자.
새끼 잃은 누 떼가 느린 바람으로 간다
이따금 응시하는 젖은 눈망울 언뜻
부시다
휜 보복 너머
대자연을 켜는 빛
- 「세렝게티」 전문, 본문 29쪽
이 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부정적 삶에의 순응’, 즉 상실의 고통을 벗어날 새도 없이 이동해야 하는 누 떼의 힘겨움이다. 새끼를 잃은 고통을 뒤로한 채 나아가야만 하는 누 떼의 느린 걸음에는 우리가 흔히 ‘자연의 일부’라 치부하는 ‘의지에 기인한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이 눈이 부시도록 “휜 보복”에 해당한다는 시인의 사유는 웅숭깊다. 여기에는 새끼를 잃은 누 떼를 향한 단순한 연민과 동정심을 넘어 이들의 고통에 전심으로 동참하는 마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휜’은 구부러짐을 의미하고, 누 떼의 구부러진 행진은 고통으로부터 삶을 돌이키려는 의지가 빚어내는 구부림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지금 누 떼는 삶의 지속이 ‘복수’에 다름 아닌 처절함으로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자연을 가로지르는 누 떼의 모습이 “대자연을 켜는 빛”이라는 인식에는 이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경건하게 그 고통의 승화를 예찬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시 「아홉사리재」 에서도 고갯길은 높고 험하고 구부러져 있다. 시는 “별들이 밤마다 내려와 쓸쓸, 을 구부린다”라며 마무리된다. 손님이 들지 않는 한적한 카페의 쓸쓸함을 풍경으로만 받아들이는 이는 생계의 고달픔을 모른다. 시인이 퇴직한 사람을 빌미로 희망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이유란, 시적 대상이 지나는 중인 터널이 끝을 보여주지 않아서다. 세상이라는 소금 언덕에 맨발을 디뎌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상처 없는 발을 가진 이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이처럼 김양희 시의 미덕은 희망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는 데 있다. 그의 시는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를 아프게 질문한다. 질문 뒤에 얻은 깨달음은 고통과 희망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해서 그의 시는 쉽게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 만큼, 쉽게 절망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김양희의 시에서 “손톱 밑 쓰라려도 뽀얗게 까 놔야제”(「부추꽃만 한 자리」)라며 종일 알토란 껍질을 까고 통마늘 껍질을 벗기는 나주댁의 바지런한 태도는 백 마디의 말보다 독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또한 “벼와 벼 기둥 되어”서 “된바람을 넘”(「일어서는 법」)기고, “한 무리 산양이 절벽을 건너” 뛸 때 “늙은 등 징검다리” 삼아 “도약”하는 광경은 ‘나’의 삶과 ‘너’의 삶이 무관하지 않고, 늙은 당신의 ‘등’이 지금껏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었음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미끄러운 유리창에 “앞발로 길을 내고 뒷발은 길 닫으며/유소유 허허 벌판을 무소유 뿔 세우고” 가는 “노린재”(「앞발로 뒷발은」)나, “뒤집힌/뻘밭을 차고/일어서는 달랑게”(「달랑게」) 역시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의 아포리즘이다.
이러한 김양희의 시에서 세상과 자신을 관찰하고 질문하며,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의 형식을 드러내는 시가 「코닥 필름이 찍은 섦」이라면, 그 내면적 바탕이 무엇인지를 짐작게 하는 시는 「사람이라고 똑같지 않아」다. 「코닥 필름이 찍은 섦」은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물질을 시작했던 어머니를 노래하는 작품이다. 어머니의 삶을 “코닥 필름이 찍”음은 청각을 시각으로 전이하는 방식이다. 감각의 전이와 어소(語素)를 활용한 개인적 방언 등은 제주의 풍경에 존재적 삶의 비의를 겹쳐놓는 김양희 시의 한 형식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외면의 내면이라고 할 시인 의식은, 「사람이라고 똑같지 않아」에서 짐승을 설득하는 “캐나다 인디언 윈다트 부족 사내들”의 의식과 일치한다. 이들은 사냥감인 짐승에게 자신들이 고기가 필요한 이유를 간곡히 설득하면 그들이 “목숨을 너그럽게 내놓을 걸 믿고 있”다. 시인은 아예 “나 오늘 이 대목 접어 마음에 꽂아두겠어”라고 고백함으로써 ‘말’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더불어 「제라하게」에서 언어는 앞선 “해녀 노 젓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구음(‘목소리’)과 입말의 형태로 드러난다.
어머니 오늘도 책 하영 읽었수광
오게 우리 딸 시집도 읽고 성경책도 읽었쪄 니네 키우멍 덮어놨던 책 보젠허난 눈도 아프곡 머리도 지끈거리곡 오죽 곱곱헌 말이가 경허여도 읽엄시난 재미정 소리내멍 읽엄쪄 소리내영 읽다보민 나 말고 꼭 누게 이신 거 닮아 당신 목소리에 당신이 기대어 사시는구나, 책 읽으멍 하영 배왐쪄게 남헌티 더 잘 허여사켜 엉턱도 부리지 말곡 이 나이에 무신 부릴 엉턱이나 이시냐마는
책 보멍 제라하게 좋은 건 시간이 어떵 감신지 몰람쪄
- 「제라하게」 전문, 본문 54쪽
“당신 목소리에 당신이 기대어” 산다는 의미는 존재자를 존재케 만드는 궁극의 조건으로서의 언어를 가리킨다. 읽다 보면 재미나고, 재미나서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나 말고 꼭 누군가 곁에 있어’ 읽어주는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어머니의 말을 받아쓰기한 시는 시인 삶의 경험적 깊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조집 제목인 ‘제라하게’는 ‘최고로’, ‘제대로’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시인은 이제야말로 고향의 방언을 최고로, 혹은 제대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 거다. 과연 시에서의 방언은 제주 특유의 삶의 감각을 빚어내는 동시에, 어머니의 일상을 심화된 형태로 빼어나게 형상화한다.
소리 내 책을 읽는 걸로 위로받는 어머니(「제라하게」), “남은 말로도 살기에 충분하다”(「이 질량으로 충분하다」)며 만족해하는 화자, “참새와도 말”을 트고, 독일어 한 자도 모르지만 “전 세계 아줌마들”과 “다 통”(「왈」)한다며 언어에 기대 사는 “베를린 미용실”의 ‘나’의 삶은 행복이 삶의 조건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레바논의 ‘레 체드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닮았다. 이곳은 수도사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생활하는 은수자(隱修者)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레 체드레 입구에는 아랍어로 이곳에 들어왔던 사람들의 이름과 사망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망일은 은수자들이 레 체드레에 들어온 날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레 체드레 이전의 삶에 사망을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선택한다. 그런 은수자들은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다’란 격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김양희 시의 인물들 역시 그러하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아이와
눈도 코도 혀도 귀도 없는 파랑새
이래도
우린 괜찮아
알아볼 수 있잖아
갈아엎은 활주로 밟고 핀 무꽃무리
전장에 스러져 간 평화를 세우면서
그래도
우린 괜찮아
이 세상에 서 있잖아
- 「알뜨르비행장」 전문, 본문 36쪽
4·3 유적지 광장을 찾으면 나오는 알뜨르비행장은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대에 위치한 옛 비행장으로, 현지 지명을 따서 모슬포비행장이라고도 불린다. 근현대사 속 제주의 비극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은, ‘아래쪽’을 뜻하는 제주 방언 ‘알’과 ‘넓은 들판’을 뜻하는 제주 방언 ‘드르’가 합쳐져 제주도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뜻을 가졌다. 원래 알뜨르비행장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만들었던 군용비행장이다. 건설 당시 모슬포는 물론 제주 전역에서 강제로 동원된 약 15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의 피가 10여 년에 걸쳐 뿌려진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알뜨르비행장을 배경으로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아이와/눈도 코도 혀도 귀도 없는 파랑새”를 일제에 강제 동원되어 희생되었거나 4·3 때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의 표상으로 세운다. 아이와 파랑새는 눈, 코, 입, 귀, 혀까지 모조리 허물어져 있다. 이들은 아무리 봐도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승을 떠도는 혼백의 모습이다. 과연 “갈아엎은 활주로” 위에 핀 흰 무꽃 무더기가 망자들의 넋인 마냥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아프도록 처연하다. 시를 쓰는 일이 상상력을 매개로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라면, 김양희 시에서의 저 흰 무꽃 무더기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이겨진 제주의 수많은 원혼이다.
유성호(한양대학교 인문대학장) 문학평론가는 “김양희 시조에는 부족방언으로서의 제주어가 지금-여기를 역설적으로 밝혀주면서 ‘시인 김양희’의 발생론과 궁극적 존재론을 함께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그녀의 시조는, 언어가 가지는 비표준화의 창조력과 함께, 제주어의 현재형을 앞으로도 선명하게 알려줄 것이다. 그 점에서 그녀의 시조는 사라져가는 존재자들을 옹호하는 귀한 마음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평한다.
신상조 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김양희의 시를 “구부러짐의 시학”으로 해석한다. “‘구부러짐’은 양가적(兩價的)이다. ‘구부러진 터널’의 입구 쪽에 서 있는 사람은 터널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며, “힘겹게 길을 걸어온 사람의 눈에 환한 빛으로 가득한 출구(‘끝’)가” 보이고, “그는 구부러진 터널의 모퉁이를 돌아 이제 막,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이는 “김양희의 시를 예감케 하는 증거”가 아닐까? 라고 질문한다.
독자들이여, “느리고 가장 긴 노래”를 통해 “햇살이 밀어 올려 다시 내는 구불길”을 펼쳐가는 김양희 시인의 “힘찬 존재론적 도약“이 보이는가. “물질은 바다보다 깊은 숨”이라는 그녀의 시조에는 정말 “새 숨이 솟구쳐 올라 고비를 벗은 비경”이 넘쳐나고 있다. “대자연을 켜는 빛”을 충일하게 선사하고 있는 김양희 시조의 “구부러짐”의 행간 속으로 아름다운 시조여행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