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시인의 첫 번째 디카시집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도서출판 작가의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11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경남 창원에서 출생했고, 창원과 부산에서 수학했으며 지금도 창원에 근거를 두고 산다. 그는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다시 학부와 대학원에 걸쳐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법과 창작 사이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은 만큼, 그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앞으로 글을 쓰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글 쓰는 작업을 병행해 왔으며, 그것은 그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창작의 열망이 잠복해 있음을 반증한다. 그가 이미 시인이자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겨울 한복판에서 결국 나의 가슴 속에 불굴의 여름에 있음을 안다”고 했던 바로 그 열정의 불꽃이다. 김정희는 이미 문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고, 다시 순간 포착의 사진과 촌철살인의 언어가 결합하는 디카시의 매혹에 빠져들었다.
이번에 펴내는 김정희의 첫 디카시집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4부로 구성되어 총 53편의 디카시를 수록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늘 뭔가를 그리고 싶었”고 “목이 마를 때는” 늘 “그리고 싶은 것”을 찾아 “바깥으로 나갔다”고 고백한다.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13편의 시들은 디카시의 기본 원칙을 지키려 애쓴다. 그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시적 대상을 볼 때, 문득 범상한 일상이 시적 감각과 리듬을 동반하는 예술성의 세계로 진입하려 한다. 시인은 이 요구에 부응하여 그 상황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심층적으로 관찰하며 거기에 생각의 깊이를 더한다. ‘세상 너머를 담아낸 렌즈의 마술’이라고 한 연유다. 「몽유병」에서는 어둠 속에 비친 달의 ‘아픈 그림자’를, 「영생」에서는 스티로폼으로 제작된 물고기 쟁반에서 ‘영생’을 이끌어 낸다. 그런가 하면 「옥상 텃밭」에서는 마음의 눈을 넓히는 강단을 보여주고, 「립싱크」에서는 바다 갈매기의 울음으로부터 음악의 음계를 묻는다.
아이는 이제 자신으로 돌아갔다
덧없이 먼지를 일으킨 하루를 묻어두고
쓸쓸하고 외로운 자신으로 돌아갔다
- 「일기」 전문
‘일기’라는 제목으로 된 시다. 어린이 놀이터를 사진으로 선택했으면 얼핏 아이가 자기 놀던 곳을 일기에 썼을 법한데, 시는 그 아이의 행적을 관찰한 시인의 관점이다. 왜 이처럼 평범한 풍경이 시의 소재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아이의 행동반경에 이제는 어른이 된 모든 어른의 기억이 숨어 있는 까닭에서다. 집으로, 자신으로 돌아간 아이가 타자가 아니라 관찰자 스스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의 한 구절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사뭇 단호한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가로등 불빛과 놀이기구의 그림자만 남은 이 공간은 ‘덧없이 먼지를 일으킨 하루’를 묻었다. 아이를 ‘쓸쓸하고 외로운 자신’이라고 쓴 발화 방식은, 이 시인의 눈이 아이와 어른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회상시점에 의거해 있음을 증명한다.
2부의 시 13편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그림과 그 뒤편에 숨은 의미 사이의 중층적 구조를 긴장감 있게 배열하는데 중점이 있다. 이러한 시의 지속적 형식은 이 시집이 미더운 예술적 바탕 위에 서 있음을 납득하게 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1935년에 제안한 사고실험의 명제를 제목으로 가져왔다. 이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어떤 상자를 열기 전에 그 안에 있는 고양이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내포한다. 시인은 이를 케이블카 속의 사람들과 그들이 가진 의식의 불확실성으로 치환했다. 「You’re 독존」은 건널목을 건너는 목발 짚은 노인의 과거와 현재를, 「세다」는 계절이 이울어 가는 것과 ‘네게 가는 길’의 대비를, 각각 겹친 꼴 눈길로 제시한다. 그리고 「허장성세」는 어느 산마루에 선 장군의 동상과 그의 공허한 외침을 한데 묶었다.
허공에 매달린
생명의 흔적
풍성한 그녀의 식탁보
- 「입동 근처」 전문
입동 근처’라는 제목을 보면 늦가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의 풍광인 듯하다. 건물 바깥쪽에 거미줄을 치고 아직 힘이 있어 보이는 거미 오른편으로 그에게 생명을 헌납한 곤충들의 잔해가 보인다. 매우 평화로워 보이나 기실은 참혹한 생존경쟁 전장戰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이와 다를 바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보면 아주 중의적인 시의 형용이다. 시인은 이처럼 ‘허공에 매달린 생명의 흔적’을 두고 ‘풍성한 그녀의 식탁보’란 창의적인 언사를 사용했다. 누구에게는 삶을 위한 식탁인데, 다른 누구에게는 삶의 종착점이 되는 잔인한 현실 세계를, 시가 가진 특유의 부드럽고 상징적인 어투에 실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만만하지 않다. 때로는 비싼 인생 수업료를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죽하면 A.랭보가 “계절이여 마을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라고 했을 것이며, 오죽하면 P.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했을 것인가.
3부에 실린 시 13편에서는 그렇게 생이 힘든 존재들을 따뜻하게 응대하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전생 혹은」에서는 ‘이고 지고 든’ 노인의 뒷모습을 주목하고, 「지귀의 사랑」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전해오는 불火의 신이자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명사인 ‘지귀志鬼’를 소환한다. 「외사랑」의 나리 꽃대 하나는 사랑을 잃고 서성이는 모습이며, 「갱년기」의 스산한 나무와 그 산발의 형상은 사춘기 아이들과 실랑이 하는 교사 또는 부모의 심경을 반영한다.
다들 배가 불렀지?
보릿고개를 생각해봐
옛날엔 죄다 논이었다니까
-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문
이 시에는 지금의 현실로부터 꽤 멀리 있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와 그의 ‘짜라투스트라’를 불러왔다. 니체는 기독교 문명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고 삶의 허무에 맞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 자신부터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 시의 사진은 가을의 들녘을 보여주면서 곡식이 아닌 풀과 꽃이 점령한 곳의 넓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다들 배가 불렀지?’ 근자에 논에다 관상용 꽃을 심고 관람객들을 모아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지자체가 여럿이다. 그처럼 세월이 달라진 터이다. 시인은 ‘보릿고개’를 이끌고 와서 옛날 농자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던 시대의 사상을 돌이켜 본다. 그 시간의 풍화작용 앞에 니체인들 더 할 말이 있을까.
영국의 시인 P.B.셀리가 「서풍부」에서 노래한 이름 있는 구절이 있다. “예언의 나팔 소리,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 지금 여기의 사정이 각박할수록 우리는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이를 위해 숱한 아픔과 슬픔, 그리움과 기다림을 대가로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내일의 소망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시집 4부의 시 14편에서 그러한 내면적 신호를 읽어낼 수 있다면, 시인과 독자는 함께 어깨를 겯고 나갈 수 있다. 「곡예사의 섬」에서 ‘다다를 수 없는 어떤 나라’에의 기대, 「황혼 엽서」에서 ‘너’에 대한 질문이 그와 같은 징후를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적멸보궁」에서 그렇게 제목을 호명(呼名)하고 목욕탕에서 사람 없는 빈자리를 보여주는데, 어디에도 부처가 없다는 말은 어디에나 부처가 있다(皆有佛性)는 말의 동의어가 아닐까. 뒤이어 「봄의 길목」에서는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로부터 과감하고 은밀하게 봄을 내다본다.
불사조가 날면
밤은 죽지 않는다
- 「천일야화」 전문
『천일야화』는 아라비아 지방의 민화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인도, 이란, 이집트 등지의 설화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작자 미상의 설화집이다. 한자 표기는 ‘千一夜話’로 되어 있다. 천일하고도 하루가 더 있는 밤의 이야기. 시인이 이 시에 그 제목을 붙인 것은, 어두운 하늘과 땅이 맞물리는 지점에 불을 밝히고 있는 도시의 야광 탓인데, 기묘하게도 그 외양이 불사조를 닮았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불사조가 날면 밤은 죽지 않는다고! 이 한 장의 사진과 이 짧은 시 두 줄은 참으로 많은 정보를 함축한다. 불사조(不死鳥, Phoenix)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지만, 어떤 곤경에 부딪쳐도 좌절하거나 기력을 잃지 않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어휘다. 곧 이 시집의 4부에서 시인이 확보하려 애쓴 소망의 언어이기도 하다.
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교수는 해설에서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절제의 의지, 극도로 말을 아끼는 이 시인의 자기 통어력이 이렇게 말미에 이르도록 흔들리지 않는 것은 상찬賞讚할 만하다. 우리는 참 좋은 디카시집 한 권을 만났다.”고 밝혔다.
최광임(두원공대 겸임교수) 시인은 “김정희의 디카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삶의 문학이다. 김정희 삶의 반경 안으로 들어온 존재에 대하여 천착하고 관계에 숙고한다. 사유는 깊되 정서는 경쾌하고 언술에는 비장미와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며, “세상이 미워지는 날, 슬퍼지는 날에 읽기 좋은 디카시집”이라고 추천한다.
세상이 미워지고, 슬퍼지는 그런 날에는 김정희 시인의 ‘세상 너머를 담아낸 렌즈의 마술’ 디카시집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