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거기’에서 체계화된 ‘여기’를 허물다
보편에 저항하며 쌓은 단 하나의 언어 예술집
《뭉그가 있는 거기》는 신이책 저자의 시/소설집이다. 문학이 타 예술에 비해 언어적인 민감도가 높은 것은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이다. 즉, 완벽한 이해를 넘어서 (설령 비문이라 할지라도) 문장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 이 또한 문학이 지녀야 할 큰 태도일 수 있다. 《뭉그가 있는 거기》는 그런 의미에서 모범적인 사례이다. 체계와 보편화된 이해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언어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해당 책의 문을 열고 있는 ‘시’는 총 2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우연히 본 숲에서 한 아이에게 홀린 감각을 시작(詩作)의 감각으로 섬세히 잇고 있는 〈후추를 가는 아이〉로부터 시작하여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를 2014년의 현장부터 2017년까지의 시간으로 확장하여 광활히 더듬은 연작 〈세월호〉, 〈삼우제〉까지. 다채롭고 깊은 주제의 시들을 살필 수 있다.
소설은 총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슈가 스핑크스〉와 〈모래가 새어 나오는 가방〉 또한 저자의 문학적 특성이 깊이 배어 있지만,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는 작품은 표제작인 〈뭉그가 있는 거기〉이다. 총 2부 중 1부만을 수록했지만, 해당 파트만으로도 저자의 문학관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서사를 이끌고 있는 인물, ‘뭉그’의 이름은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크 뭉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국어사전에 등록된 ‘뭉그적거리다’가 계속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나아가지 못하고 게으르게 행동할 때 표현하는 해당 동사는 뭉그라는 인물이 언어의 민감성으로 인해 보편화된 체계 속에서 미끄러지고 있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한 ‘뭉그’는 저자의 페르소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시부터 내내 보여 주었던 저자의 언어 민감성이 그대로 뭉그라는 인물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뭉그가 있는 거기〉가 메타적 소설로 읽히는 것은 충분한 독해이다. 그렇다면 해당 소설은 ‘저자의 문학성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그려 낸 절망적 신호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뭉그’라는 어두를 가지는 다른 동사가 있기 때문이다. ‘뭉그러뜨리다’라는 동사는 ‘높이 쌓인 것을 무너져 내리게 함’을 표현한다. 즉, 보편의 세계가 뭉그를 배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뭉그의 언어 민감성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체계들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기묘한 자유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뭉그의 핏속에 흐르는 선천적 공감각이 생략되거나 누락된다면 끝내 ‘뭉그가 있는 거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138페이지)
해당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마음에 남는 이유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속의 모든 체계는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허황’일 뿐 절대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진실이라는 건 끝내 잡을 수 없는 무언가일 뿐이라는 것을. 뭉그, 그리고 저자는 그 사실을 가장 문학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둘의 헤맴은 여전히, 그리고 내내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 자세로, 실패 없는 결말로, 그저 체계가 허물어진 자유로움 안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