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단 한 사람, 이제 떠나보내려 하네
- 김순실 시집 『어디에도 없는 빨강』
199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춘천에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김순실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어디에도 없는 빨강』을 펴냈다. 달아실기획시집 31번으로 나왔다.
세 번째 시집 『누가 저쪽 물가로 나를 데려다 놓았는지』(2017)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것인데, 김순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번 시집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유난히 비가 잦은 올해. 물방울로 가득한 책을 읽고 비를 타고 오는 그대 생각에 시 읽기로 보낸 나날. 시에게 입은 은혜가 크다. 시는 어둠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꽃이라는데, 시로 와준 모든 연민들이여. 그 눈빛의 목록에 집중하는 것, 마음에 이는 파동을 잘 살피는 것,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내 생의 단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이 시집이 세상에 보내진다. 6년 만이다. 글썽이는 눈시울을 다독여주신 모든 분들께 이 시를 바친다.”
풀풀 날리는 함박눈덩이 뭉쳐
서로에게 던지는 저녁
뜸 잘 들인 눈 한 수저 뜨네
눈을 맞고 서 있는 목련나무
오늘밤 폭설에 꽃 피우겠네
- 「딸랑거리는 저녁」 전문
파르르 돋아나는 그대 생각 따라
어린 밤은 점점 피어나네
어둠이 어둠이 아닐 때까지
나는 당신이 밀어주는 그네에 흔들려
여름밤으로 망명해버리네
- 「여름밤의 망명」 부분
누구는 도서관에서 영혼의 고래 같은 사람 만났다는데
나는 창가에 앉아 고래가 드나드는 꿈을 꾸지
고래와 생각 사이를 넘나들던 새들
순간 솟구쳐 올라 가없이 사라지네
새들의 창은 얼마나 넓을까
새들이 조망하는 세계에서
나의 창은 얼마나 작을까
- 「나의 작은 창窓」 부분
머리가 핑 돌아 남편을 낳았고
배가 아파 딸을 낳았어요
그래서 파란만장을 낳았죠
- 「그대를 낳아요」 부분
춘천교대를 졸업한 후 30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시인은 만 50세라는 늦은 나이로 등단하였고, 지금까지 펴낸 세 권의 시집을 통해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바 있는데, 평생의 동반자였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애별리고(哀別離苦)를 딛고 마침내 6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은 더욱 단단해진 시편들로 가득하다. 가령 “눈을 맞고 서 있는 목련나무/ 오늘밤 폭설에 꽃 피우겠네” “나는 창가에 앉아 고래가 드나드는 꿈을 꾸지” “어둠이 어둠이 아닐 때까지 여름밤으로 망명해버리네” “남편을 낳고 딸을 낳고 파란만장을 낳았죠” 등등의 문장만 보더라도 이를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시인 전윤호는 이번 시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 김순실은 참 교과서적인 사람이다. 언행이 너무 착해서 글에도 그런 모습이 자꾸 드러나 ‘제발 실밥 뜯는 얘기는 밖에 나와서 하진 마시라’는 잔소리도 듣곤 했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인간 김순실이 아닌 시인 김순실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미처 캐내지 못했던 기원과 발칙한 욕망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김순실 시인은 이제 콩새가 되어 날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박수를! 그리고 점점 더 대담해져서 커밍아웃도 한다. 시인을 잘 알고 지켜보는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무척이나 바람직한 것이다. 이제 떠난다는 선언을 했으니 다음 시집에서는 떠난 자의 여정에 대해 말해주기를 은근 기대하는 것이다.”
김순실 시인의 시는 7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마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지금도 계속 젊어지고 있다. 그의 다음 시집이 기대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