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는 신료 박종악이 국왕 정조에게 보낸 편지 105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정조가 보낸 편지는 그동안 공개된 것만 1,200여 편에 이르지만 신료가 정조에게 보낸 편지는 『수기』 이전까지 단 한 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장서각에 소장된 1책 124장의 필사본 『수기(隨記)』는 ‘때에 따라 기록한다’는 뜻의 제명으로 인해 견문을 기록한 잡기 또는 일상생활을 적은 일기로 여겨졌으며, 편저자 미상의 책으로 전해오다가, 2014년 장유승 연구원이 그 내용과 자료적 성격을 밝히면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이 책은 『수기』의 영인, 탈초, 역주본이다.
『수기』에 수록된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편지는 1791년부터 1795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박종악이 충청도 관찰사와 우의정을 거쳐 연행의 귀로에서 타계하기 직전까지 보낸 것이다. 이 시기는 박종악이 조정의 요직에 있던 시기로, 당대의 정치 현안이 두루 언급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공식적인 사료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입을 세 겹으로 꿰맨 것처럼 하라는 성상의 말씀”(39쪽)이라는 언급을 통해 정조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상소는 어제 하교하신 대로 내일 올리겠습니다.”(158쪽)라는 발언에서는 사건을 공론화하는 방법과 시기를 조율한 흔적도 엿보인다.
『수기』에 수록된 편지의 내용은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정조가 추진한 노비제 개혁을 비롯한 조정의 주요 정책에 대한 논의이다. 이러한 내용은 『수기』의 초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노비제 개혁 외에도 군역의 개정, 재해를 입은 군현에 대한 부역의 견감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둘째는 충청도 초기 천주교회의 실상에 대한 내용이다. 진산사건의 여파로 천주교 확산에 대한 조정의 경계가 한층 강화된 시기에 박종악은 정조의 명령에 따라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도들을 탐문하고 그들의 동향을 편지로 보고했다. 18세기 말엽 충청도 일대에 일반 양인층에 천주교가 성행했다는 점과 천주교를 전파시킨 주요 인물, 천주교도의 생활상, 당시 전파된 천주교 서적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주목할 만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셋째는 정조 후반 정국의 당파적 입장과 당파 간의 대립 관계이다. 박종악은 『수기』에서 자신은 노론벽파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고 밝히며, 김종수를 비롯한 벽파의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채제공과도 사사건건 대립하는 극단적인 갈등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점들은 정조 후반 정국의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여 준다.
넷째는 사행 관련 내용이다. 박종악은 1792년과 1794년 두 차례 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이 과정에서 보낸 편지는 모두 『수기』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청 황제와 조정의 동향을 보고한 편지의 별지는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