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심방동 사산서당(士山書堂)에 소장되어 있는 간찰첩 21책 중 101건의 간찰을 선별하여 도판을 싣고 그 원문을 탈초·정서했다.
사산서당은 진양하씨(晉陽河氏) 담헌(澹軒) 하우선(河禹善, 1894~1975)의 강학처이다. 하우선은 덕천서원 유계(儒契)를 결성하고 덕천서원 동재(東齋)를 복원하였다. 새로운 남명 문인을 발굴하여 문인록인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을 편찬하고 『남명집』을 다시 간행하였다. 그는 일생 남명과 덕천서원의 위상 회복을 위해 힘썼다.
사산서당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는 모두 1,800여 점에 이른다. 이는 이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1593~1666)와 그의 아우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 1603~1651) 때부터 전해져오는 것으로, 대부분 간찰(簡札)이며 그 외 통문(通文)과 시문 원고 및 만사(挽詞), 제문(祭文), 소지(所志), 혼서(婚書), 단자(單子) 등이 있다.
하홍도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경의지학(敬義之學)을 사숙(私淑)하여 학문을 크게 이루어 ‘남명 이후 제일인자’라 칭해진 인물이었다. 하홍도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 집권세력에 의해 왜곡된 남명의 위상을 회복하고, 몰락한 남명학파를 수습하여 후세에 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덕천서원 원임·원장, 용암서원 원장 등을 지내며 남명학파의 가장 중추적인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다.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으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았지만,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한편 아우 하홍달도 하홍도와 함께 가사산(佳士山) 기슭에 모한재(慕寒齋)와 경승재(敬勝齋)를 짓고 강학하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남명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문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몇 편만 전한다.
이 가문의 간찰은 강우지역 유림과 남명과 덕천서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재정비, 남명연원의 변화, 덕천서원 유림의 동향, 덕천서원의 변천, 강우지역 유림과 노론 집권층과의 갈등, 강우지역 유림사회의 문제와 여론, 선비들의 일상·교유관계·학문 방법·수양 방법 등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