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을 잇는
기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곳에 살고 있다〉는 전세보증금을 사기당하고 홈리스가 된 ‘나’와 음주운전 사고로 가족을 잃은 쑨이 거리에서 생활하는 이야기다. 환영인지 아닌지 딸의 웃는 얼굴을 본 쑨이 떠나가고,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성훈이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 뒤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당신의 선택이 간섭을 일으킬 때〉는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을 들고 달아난 형을 카지노에서 찾는 동생 건우의 이야기다. 형이 도박에 빠지게 된 과거에서 형을 찾는 현재로 시점이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정체 모를 남자의 안내로 당도한 장소는 가족의 운명을 바꾸게 한 도박판이 벌어진 현장이었다. 동생은 그곳에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된다.
〈땅굴지기〉는 어느 날 지면에 생긴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에 홀린 듯 자발적으로 구덩이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막고, 각종 무기로 안개를 흩어지게 하는 땅굴지기 규식과 후임자로 온 재헌의 이야기다. 원인을 모르는 자연현상에 사람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한 정부의 대처를 받아들이는 두 인물의 차이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처럼 분명하게 갈리면서도 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은 처음으로 지휘한 유괴사건에서 범인을 놓쳤던 인경이 뇌에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드림 패키지를 통해 범인을 쫓는 이야기다. 그녀는 삭제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글라시스캡을 장착하고 범인의 실체에 다가가는데, AR로 구현된 세계에 있는 범인과 두 눈이 마주치게 된다.
표제작인 〈그러니 귀를 기울여〉는 싱크홀 공사 중 사라진 아버지를 쫓다가 시공간에 갇혀 실종 직전의 상황을 반복 중인 아버지의 음성을 벽 너머로 듣게 되는 아들 한규와 아버지의 오랜 직장 동료 정일의 이야기다. 저쪽의 소리가 들리지만 이쪽에서 갈 수 없고, 이쪽이 있다는 것을 저쪽에 알릴 수 없다. 하지만 이쪽과 저쪽을 잇는 통로가 있을 것이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포기할 수 없다. 이는 실종된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아들의 애절함이라기보다 아버지가 사라진 이유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아들의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몰하는 것들〉은 갑작스러운 모래폭풍으로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남은 사라가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 규오에게 빵을 건네며 엄마와 동생을 다시 만날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언제 사몰될지 모르는 저지대에서 벗어날 티켓을 얻고, 그곳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 생각하던 사라에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스터리 단편소설
이 책은 전세보증금 사기, 음주운전 사고, 도박, 싱크홀, 아동학대, 입양과 파양, 뇌와 연결하는 AR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양자역학과 평행우주 등의 물리적 조건 때문에 등장인물의 삶에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는다. 모든 사회적 이슈에 흥미를 느끼고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의 감수성이 아니라 과학의 객관성이다. 작가는 양쪽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 속 상황을 상상하기 쉽게 묘사했다. 각 작품의 분량은 비슷하지만, 읽는 호흡은 다르다. 어떤 작품은 긴장감에 결말까지 빨리 달려가게 되고, 어떤 작품은 눈앞에 펼쳐진 듯한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