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자 시인의 詩 世界
-회고적 삶의 사유를 중심으로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의 어록 중에서
『시인, 문학박사 / 조선형』
1.
데카르트는 사유를 넓은 의미로 ‘의심하고, 이해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으며,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다. 태어나면서 유년기를 거치며 첫 물음은 태생일 거다. “엄마! 아이는 어디서 나오지?” 그리고 주변 자연 생물에 대해 끊임없는 물음들이 이어진다. 아이는 대체로 성장기 학습을 통해 하나하나 의문을 해결해가지만, 노년의 사유는 좀 다르다. 인생에 대한 솔직함 물음이다. 살아온 세월이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해 엄청나게 짧다. 따라서 제2 시집 『황혼을 사유하다』는 김수자 시인의 회고적 삶에서 얻은 사유의 편린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시인은 지난해 제1집 『살며 사랑하며 추억하며』를 세상에 내놓았음에도, 곧바로 후속작인 2집 『황혼을 사유하다』를 낸 걸로 보아 그동안의 쉼 없는 창작열의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시인은 제1집의 ‘시인의 말’에서 “잔물결 위에 파도 같은 날들이 철썩이며 지나갈 때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모아 가슴 깊이 올린 시편들로 얼굴을 내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다른 나로 살고 싶다” 고도 했다.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1집이나 2집 모두 계곡의 바닥까지 보일 듯이 투명해서 흠 잡을 곳이 없는 느낌을 준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진솔하게 털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침을 깨우는 빗소리 멎자
함초롬한 자줏빛 고운 자태
비개인 하늘 푸르고 맑아
오늘의 감사를 만드는 구나
이 아침 나팔꽃 이슬을 머금고
정겨운 눈빛 인사를 건넨다
활기찬 하루의 푸릇한 여정을
청춘 같이 살라하네.
- 「나팔꽃」 전문
‘나팔꽃’의 시에서 애써 군더더기를 찾으려 해도 그저 시가 맑습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나팔꽃을 바라보며 시인도 그처럼 청초한 하루를 열고 싶어 한다. 정겨운 인사는 시인의 품성이며, 아침의 희망을 열고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엿보이겠지요.
김수자 시인이 사유의 가장 좋은 때가 궁금하다. 아마 붉게 물든 석양녘에 어쩌면 ‘커피 한 잔 하며’ 황혼의 인생을 회고할 때가 아닌가.
석양은 뉘엿뉘엿 내리면서 하늘을 붉게 물들입니다.
서서히 인생을 관조하며 사유하는 것처럼 낙조 된
저녁의 정적이 깊어 갑니다.
어둠이 깔리면서 사라져 가는 빛과 그림자들....
점점 희미해지는 세상을 보며 한없이 생각에 잠깁니다.
뒤늦은 회한悔恨을 잔물결 위에 띄우며
흔들거리는 물결위로 비추이는 내 모습의 조각들....
2
김수자 시인의 2집에서 말하고자 한 ‘회고적 사유(思惟)’에는 전편 『살며 사랑하며 추억하며』에 나오는 「삶의 의미」를 묻는 데서 이미 시작한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아는 사람은/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고/비를 맞으며 혼자 가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고, 그러면서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삶의 의미」 일부)며 비를 맞으며 혼자 걸을 때가 진정 사유의 공간이라고 말해버린 겁니다.
이는 제1부 ‘커피 한잔의 여유’라는 제목에서 다소 시인의 여유로운 철학적 공간으로 확대하며, 가을비 추적거리는 날에 외로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며 ‘살아 있음에/축배를 든다’ 며 존재론과 사유의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의 시작이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에서 보듯 ‘사유’와 ‘존재’는 서로 분리해 생각할 수가 없다.
시인의 회고적 삶은 「청어의 삶」에서 보자.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무엇일까요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지난날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살아보니
지나고 보니 인생의 절정기는 철없는
청년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매운 맛 쓴맛 다 보고
무엇이 참으로 소중한 지를 진정 음미 할 수 있는 시기
60대중반 70대 중반이 삶의 황금기였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삶은
잠시 하나님께 빌린 것
우리는 잘 쓰고 가야 한다
인생의 절정기인 지금
열심히 즐겁게 봉사하며 살아요
베풀어 주신 은혜와 이곳 까지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요.
- 「청어의 삶」 전문
시인은 「청어의 삶」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화두를 던지더니,
이내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잠시 빌린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는 어쩌면 ‘잘 쓰고 가야 하지 않느냐’며 물음에 대한 답을 준다.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는 6,70 대 노년의 삶은 자꾸 지나온 흔적을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청어 같은 젊은 시절엔 앞만 보고 살았으니 그 시절엔 무엇을 사유할 겨를이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국 시인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음미하는 황금의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 초반의 나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혼자인데/기도하니/하나님께서 동행 하십니다//돌아보면 사방이 꽉 막혀 있는데/기도하니/하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돌아보면 내가 한 것 같은데/알고 보니/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중략)
- 「돌아보면」 부분 중에서
이는 시인의 회고적 사유의 또 하나의 일례다. 그녀의 노년은 늘 ‘신앙의 산책로’에서 하나님과 마주한다. 그러면서 지난 삶을 반추해볼 때 ‘기도하니/ 그가 귀 기울이셨고/ 응답하셨다’는 그녀 나름의 사유의 등식을 내놓는다.
모든 글에는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기타 등등 어떤 장르의 글이건 간에 서론 본론 결론 또는 기승전결 방식의 전개가 독자들이 읽기에도 좋다. 그 중에서 낯설게 하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대목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하는 의문을 갖도록 해주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엄청난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에게 공히 글맛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자 시인의 서정이 잔뜩 묻어나는 「바람」을 통해 사유의 글맛을 보자.
바람은 스쳐 갈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저 가지 끝에 맺힌
홍매화의 붉은 꽃망울
누구의 숨결 인가요
이 가슴에 머무는 그리움은
누가 머물다간
흔적 인가요.
- 「바람」 전문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는 존재다. 그런데 ‘바람, 흔적, 홍매화, 꽃망울’ 하다가 3연에서 ‘누구의 숨결인가요’ 하고 던진다. 청자는 이 낯설기 부분에서 잠깐 당황하는 듯하지만 결국 누가 머물다 갔는지 조차 모르는 것이 바람의 존재인 것을 알아차린다.
왁스의 4집 앨범에 ‘황혼의 문턱’이란 제목의 가사를 보면 황혼의 의미가 확연하게 다가온다.
어둠을 뚫고 해가 나듯이 우리의 삶은 시작 되고,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힘이 있던 청년의 야망과 꿈이 서서히 스러지는 석양의 황혼에 선 인생의 자리, 이때가 가장 사유하기 좋은 때이다. 가사를 함축하면 이렇다. “축복받은 인생으로 태어나 사랑받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어른이 되어 험난한 세상을 살다 어느새 늙어 황혼의 문턱에서 옛 추억에 깊은 한숨만 짓는다.”는 내용이다.
시인이 고희를 넘기며 회고하는 인생의 열매는 한 마디로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이다. 이와 유사한 고사성어로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중작약(苦中作藥), 구한감우(久旱甘雨) 등’이 있다. 모두가 고생 끝에 즐거움이 찾아온다는 공통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련이 없으면 알맹이가 부실하고/폭풍도 가뭄 같은 갈등이 있어야/껍데기 속의 영혼이 깨어나 여문다네//우리네 삶도 매일 매일 즐겁고/좋은 일만 있다면 우리의 영혼 속에/알토란같이 옹골차지는 않으리라//그친 파도가 유능한 사공을 만들고/세상에 거친 파도 고통과 시련 속에/튼실하고 탐실한 열매를 맺는다네.
- 「인생의 열매」 전문
시인은 유독 가을앓이를 한다.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에 대한, 무언가 낮아지고 싶고 비운다는 것에 대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황혼 앞에 선 시인의 사유다.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성숙한 여인의 로망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돌아보며 더 낮아지고 비울 때
분분히 지던 낙엽 바라보며
조금씩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세월의 뒤안길 더 잃을 것이 없을 때
더욱 밝고 화사하게 걸어가리라
슬퍼하지 말자 이별이란
빛과 향의 조화이려니
맑은 영혼과 넉넉한 마음으로
향기 가득 피어나는 것이리니.
- 「가을 앞에서」 전문
한편 김수자 시인의 심연 속 추억의 공간에는 고향의 향수와 어머니가 존재한다.
먼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석양」을 음미해보자.
석양을 바라보면/눈시울이 붉어진다//수평선 돌아드는/을숙도 갈대밭에//허기진/
배를 채우는/물새 소리 여문다.(「석양」 전문)
석양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나 황혼의 인생 앞에선 모습이 같다. 부산이 고향인 시인의 을숙도에 대한 추억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물새의 모습과 허기졌던 시인의 어린 날과 오버랩 된다.
어머니란 존재는 시차가 없다. 어머니의 자식이 자식을 낳아 어머니가 되어 있어도 유년시절의 추억 속 어머니가 주는 사유는 ‘손맛과 사랑’이다.
외롭고 힘들 때 어머니의 손맛이 나는 밥상을 사유하면 치유의 힘이 생긴다.
‘유년시절 어머니의 칼도마 소리는/어머니의 넉넉한 미소처럼/사랑을 요리하는 소리였기’(「어머니의 밥상」 일부)에 엄마에 대한 추억만으로도 시인 자신은 물론 모든 이에게 무한 영역으로 세상을 이길 힘을 준다.
3.
손남주 시인은 “발견의 시학(詩學)은 급소와 경락을 짚는 것.”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해 마치 한의사가 급소와 경락을 짚어 진맥과 치료의 핵심을 찾듯이 무릇 시인은 시의 자리를 찾는 일에 힘써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시에도 이러한 자리가 있어, 시인은 이 자리를 창조해 내고, 독자는 이 시의 자리를 잘 짚어내는 눈을 가짐으로써 한 편의 시는 짜릿한 감동을 얻는다.” 고 말한다.
박곤걸 시인의 산에 묻혀 시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산에 묻혀 풀이나 뜯어먹고 살 거다./산이 받아 줄지 말지/적막강산이다.//막상 산에 당도하니/바위는 눈을 감고/나의 유배에 대하여 묵묵부답이다.//무슨 득도를 할 거라고/천성이 순한 산양이/암벽을 기어올라 초식을 하고 있다.//(「산에 묻혀」 일부 중에서)
위의 시에서 독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신을 느낄 수가 있다. 천성이 순한 산양이 무슨 득도를 할 거라고 암벽을 기어올라 초식을 하겠는가! 산에 도를 닦으러 간 것이 아니라, 암벽에 기어올라 초식을 하는 것 자체가 산양의 삶일 뿐이다.
김수자 시인의 4부 〈신앙의 산책로에서〉에서 본 신앙 시에서도 무위자연의 느낌을 받는다.
나는 보았네 꽃들의 밝은 웃음을
나는 들었네 꽃들의 합창을
시린 가슴 눈물 흘릴 날 많고
쪼들린 살림 탄식도 할 만한데
이슬 머금은 활짝 핀 나팔꽃
생명 주심에 감사하네
삶의 기쁨 찬양하는 밝은 아침
햇살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네
기뻐할 줄 알고 감사 할 수 있어
거친 길섶도 가리지 않는 지혜로운 꽃이었네
이 모든 것 하늘에 소망을 둔 이유였고
기쁨과 찬송은 주님 만난 까닭이었네
.- 「기쁨과 찬양」 전문
위의 시에선 박곤걸 시인의 ‘산에 묻혀’ 초자연적 삶을 살고자 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전자는 산양이 득도하기 위해 산에 묻혀 사는 존재가 아니고, 험한 절벽임에도 불구하고 암벽을 올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산양의 일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후자의 시 「기쁨과 찬양」은 시인의 하루하루의 삶이 거창한 득도를 위함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려는 일상을 노래한 것이다.
사람은 항상 사유한다. 그러나 사유는 존재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는다.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황혼의 때가 가장 아름답다. 왜냐하면 회고적 사유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좋을 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