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역사를 떠날 수 없다
한 권의 시집에 지난 역사가 오롯이 담기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언급이나 나열이 아니라 거기에 휘말린 삶들의 목소리와 비참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은 특히 어렵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역사 속으로 깊이 잠행해서, 지워진 또는 은폐된 삶을 살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형로 시인은 이번 시집 『숨비기 그늘』에서 그 모험을 감행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짓밟은 삶 자체다. 구체적으로 김형로 시인은 이 시집에서 제주 4ㆍ3과 광주 5ㆍ18, 그리고 여타 현대의 참극들에 희생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들려준다. 시집의 2부는 제주 4ㆍ3에 3부는 광주 5ㆍ18에 그리고 4부 역시 부조리한 현실에 짓밟힌 현장과 삶을 드러낸다.
닷새 뒤에는 엄마가 청년들에게 잡혀갔지요 외할머니에게 우리 애기 잘 키와줍서, 잘 키와줍서 그 말 남기고 갔어요 지서 앞 밭에서 총 맞았다는데 한 번에 안 죽이고 데굴데굴 구르다 땅을 긁어 손톱이 다 빠져버렸대요
그 모든 게 아버지 때문이라 했지요
_「보리밭에서 푸른 하늘을」 부분
머리 깨지고
벗긴 채 끌려가고
대검에 찔리고 군홧발에 걷어채인
피 흘리는 사람들 앞에서 터진 외마디 비명
내 새끼를 왜 이러냐고
_「내 새끼를 왜 이러냐고」 부분
「보리밭에서 푸른 하늘을」은 제주 4ㆍ3을, 「내 새끼를 왜 이러냐고」는 광주 5ㆍ18을 일부 증언하고 있는데 이런 사례들은 시집 전체에 고루 편재되어 있는바, 김형로 시인의 이 시집을 읽다 보면 현재라는 시간이 대한민국의 고통스러운 역사로 이루어져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시인이 의도한 것은 단순한 증언 자체가 아니다. 도리어 그 사건들이 일어난 의미를 다시 복원하는 일이 시인의 바람인 것이다. 즉 제주 4ㆍ3이 염원했던 “느 것 나 것 없는 좋은 시상”(「보리밭에서 푸른 하늘을」)이나 광주 5ㆍ18의 정신인 “피와 땀과 숨이 어우러진 대동세상”(「내 새끼를 왜 이러냐고」)이 그것인데, 달리 말하면 그런 세상을 원했기에 독재자들은 제주 4ㆍ3과 광주 5ㆍ18을 일으켰던 것이다. 두 사건 다 우리 역사의 어떤 분기점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것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슬쩍’에서 ‘입멸’까지
그렇다면 김형로 시인이 상상하는 “느 것 나 것 없는 좋은 시상”이나 “피와 땀과 숨이 어우러진 대동세상”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 시가 추상적이고 큰 언어만 뱉고 말면 그만이 아닌 것은 이제 누구나 하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인에게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김형로 시인이 그리는 그 ‘세상’의 모습은 비탄과 죽임의 순간에도 숨 쉬고 있었다.
자식 잃은 에미가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도보 행진 나설 때
칼바람 뼛속까지 몰아치는 날
모르는 사람이 목도리를 에미 목에 둘러준다
제 것을 벗어 아무 말 없이, 슬쩍
_「슬쩍」 부분
“자식 잃은 에미”가 참담한 심정으로 그 원인을 밝혀달라고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도보 행진 나설 때” 누군가 칼바람을 덜어줄 목도리를 둘러주는 그 짧은 순간. 거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문제를 곧장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고통을 덜어주는 작은 행동들의 연합 또는 겹침을 김형로 시인은 꿈꾸고 있다. 시인은 거짓 선지자의 적일 수밖에 없다. 큰 것을 상상해도 시의 언어는 언제나 풀잎처럼 생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형로 시인도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삶을 삶답게 해주는 것은 이런 ‘슬쩍의 윤리’(김동현)의 지속인 것임을. 그 작은 것들 또는 짧은 순간들의 힘이 역사의 무게를 지탱하게 해주는 하부가 된다는 것을.
한 그릇 국밥
알아주는 이에게 목숨 버리겠다는 듯
후룩 크읍 쩝 험험 후루 크윽
제 무덤 속으로 주저 없이 몸을 던진다
_「국밥 한 그릇」 부분
이 시는 “한 그릇 국밥”이 주체인데, 국밥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목숨”을 버린다. “주저 없이 몸을” 던져 다른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 무덤”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 된다. 「국밥 한 그릇」이 제주 4ㆍ3과 광주 5ㆍ18을 회피하지 않은 목숨들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김형로 시인이 『숨비기 그늘』 전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역사적 참극이 단지 참극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진실’이다. 그런데 이 진실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진실과 한몸이 되는 일은 또 여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법조문 침 바르는 잔챙이”나 “계산만 해대는 조무래기”가 되지 않고 “풍찬노숙 천둥소리”(「어디 없나」)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가 삶의 도(道)와 덕(德)을 떠나 자율적으로 존재한다는 근대시의 오랜 병폐에서 김형로 시인의 시는 훌쩍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읊조림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삶의 도(道)와 덕(德)을 훼손시키려는 역사의 진행에 맞서다 온삶이 참극이 되어버린 존재들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시인 스스로 새로운 삶의 도(道)와 덕(德)을 묻고 있을 뿐이다. 굴비의 생을 통해 불가해한 역사의 시간을 회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긍정하면서 통과해야만 입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할 때, 시인 김형로가 품고 있는 새로운 삶의 도(道)와 덕(德)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엮걸이에 달리며 저 굴비의 아가미엔 짠 소금이 구름처럼 왔을 것이고
짠 바다에서 더 짠 소금 속에 들어가는 몰입을 배웠을 것이고
속을 버리고 자세만 남은 몸으로 하나의 몸짓, 하나의 표정이 되어 아직 끝나지 않은 길에서 마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입멸이란 것이고
_「굴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