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로 나누어 68편의 작품을 담은 시집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시인의 새로운 희망을 그린 시편들로 시작한다. “때애앵~/ 새 시간이 문을 연다”(「보신각 제야의 종소리」), “해가 바뀌고 새해 해오름처럼/ 가슴 벅찬 새로운 생각들이”(「가끔은 이럴 때도」), “…온몸으로 뻗어오는/ 내가 살아있다는 희열// 창밖으로 밀려오는/ 눈부신 함성/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인식」) 등 시인의 새 시간은 “만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빛으로 온다”(「아침 안개」). 이와 같은 표현대로 시인의 시편은 대개가 빛나는 희망을 품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오랫동안 산업기술자로 기술을 전파하며 거주한 바 있는 시인의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 세상과 삶의 체험과 사색은 시집 전반에서 활달할 뿐만 아니라 진실하고 건강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태양이 대지를 옥죄는 한낮/ 새들은 목 타래를 틀고/ 정글 깊이 날아들고/ 팜트리 잎조차/ 빛바래며 늘어진다/ 지상 생물들의 숨길을 차단하려는지/ 이글거리는 태양/ 푸른빛 하늘마저 하얗게 변한/ 적도의 한낮/ 뜨거운 열정이 폭죽처럼 터진다”(표제작 「적도의 한낮」 전문)
쿠알라룸푸르의 페탈링 자야에서 맞이한 봄에 관한 감상을 그린 작품 「어느 봄에 대한 회상」(“높은 산 잔설은/ 겨울을 안고 있건만// 산기슭 돌 틈으로/ 제비꽃 봄소식 전하네//…”)과「꿈의 안팎」(“…/ 햇살이/ 누리를 감싸면/ 나의 꿈은/ 흩어져/ 푸른 하늘/ 무지개 색깔로 피어오르다가/ 더러는/ 대지의/ 품속에 안기어 풀씨로 살아나리”), 부킷 라자에서의 「초록 낙엽」(“…/ 떨어진 초록 잎은 갈잎으로 변하고/ 푸른 꿈 일구는 대지가 된다”), 랑카위섬에 있는 산을 쓴 시 「구눙 마뜨 진짱에서」(“…/ 바람은 숨을 죽이고 안개를/ 쉼없이 거두어 가고 있다// … // 차츰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산과 마을과 정글/ 안개에 갇힌 사물이 빛을 받아/ 비로소 제모습을 드러낸다”), 또 「새벽비 1」(“…/ 새벽을 깨우며 비가 내린다// … // 새벽이 가까이 서면서/ 하나둘/ 빛들이 밝아진다”), 「소나기가 빚어내는 고요」 등 적도의 나라 이국의 자연으로부터 받은 생생한 감응과 활기찬 사유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시편이 환하다.
자연을 관조하고 시적으로 형상화한 시인의 또 다른 시편에는 투명하고 진솔한 시인의 감정이 담겨있다. “나는/ 꽃비 내린/ 거리를 거닐며/ 상념에 잠긴다”(「벚꽃 무상」), “환한 봄이 와 있더군요/ 봄비가 가져다준 촉촉한 행복이었어요”(봄비에 실려 온 행복」), “홀린 듯 너에게 매료되어/ 길을 잃었다”(「채송화」), “잠시 숨 고른다/ 거슬러 다시 오를 수 없는 길”(「가을이 흐른다」), “가버린 것은 그리움으로 물들어 아름답다”(「마음에 물드는 단풍」), “떠돌고 떠돌다가/ 저 맑은 계곡 흘러가듯이/ 함께 흘러가리”(「나도 누군가의 바람이 되어」), “첫눈이 내리는 날은/ 누구라도/ 함께 걷고 싶다”(「첫눈」), “제 모습 바꾸지 않고/ 애타게 사모하는 마음‘(「파도」) 등 내면에 새겨진 문장을 담은 아름다운 시편이 그러하다.
“히비스커스 꽃술에/ 가만히 손대어 본다/ 나뭇잎 정답게 쓰다듬어 본다/ 무궁화를 닮은 꽃/ 그러나/ 다른 나라 국화/ 이국에 있으면/ 하늘만 바라봐도/ 오늘처럼/ 마음 여려지는 날/ 가끔 있다/ 고국이 그리워지는 날/ 내 마음속에 무궁화가 핀다”(「마음 여려지는 날」 전문)
시인이 품은 그리움과 향수의 감정을 감성적으로 형상화한 시편들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공장 지대와 항구로 변해 버린 시인의 고향 “양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정한 품이 있고/ 어린 나의 숨결이/ 꿈속에도 꿈길을 열어/ 나를 다시 그 꿈속으로/ 지향 없이 데려가는 곳”(「귀향」)이며. “청남빛 꿈/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던 곳”(「고향 생각」)이며 내 그리움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안부를 전하는 시편들이 애틋하고 감각적이다.
“마음은 붉디붉은 꽃/ 사철 푸른 잎 그늘 키우며/ 늘 그곳에 있는 동백처럼/ 고향 양죽에 있다/ 쏟아지는 별들과 은하수에 꿈 싣던 여름밤/ 동대산 두둥실 보름달에 소원 빌던 쥐불놀이/ 고개 만당 넘어 경골새로 들어서면/ 위엄스런 자태로 언제나 반겨주던/ 마을 수호신 포구나무/ 조그만 열매 붉게 익어 터질 때/ 고향도 추억도 함께 터진다/ 아…/ 그리운 고향, 양죽”(「그리운 고향, 양죽」 전문)
“그의 시 세계는 광활한 시계로 열려 있다. 활달한 그의 정신세계는 특유한 체험을 통해 사유의 폭을 넓혀 다양한 시편을 창출하는 데 복무하고 있다.”(박종해 시인)라는 평을 받는 서태일 시집 『적도의 한낮』. 공학과 인문학 두 세계를 기꺼이 넘나드는 시인의, “현묘한 변신”을 거듭하는 시를 만나려는 절실한 열망이 빚어낸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