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감동
세상에 발돋움할 모든 어린이를 환영하는 이태준의 글
한국문학의 든든한 기둥인 이태준의 동시와 유년동화를 모은 『돈 가져간 사슴이』를 선보인다. 1930년대 『어린이』 『소년』 등의 잡지에 실린 뒤 단행본으로는 처음 만나는 작품들도 수록되어 더욱 뜻깊다. 새로 소개하는 작품은 「바지 셋」 「돈 가져간 사슴이」 「겨울꽃」 「호랑이」 「길에 그린 사람」까지 총 다섯 편으로, 짧지만 다채로운 의미가 담긴 동시와 더불어 간결한 구조의 이야기에는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소설을 쓰던 이태준은 가정을 이루고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시와 동화를 썼다. 독자들은 이태준의 동화를 읽으며 그가 어린이에게 보이고 싶은 세상이란 더없이 순수하고 누구든지 조건 없이 환영하는 세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어린이가 처음 만나게 될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짧은 동화 「호랑이」에서 ‘동생’은 호랑이가 사탕을 사러 왔다가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리지만, 이내 “그러게 너도 눈깔사탕 사 달라고 조르지 말어.” 하는 ‘언니’의 말을 들은 뒤 가만 생각에 잠긴다. 짧은 대화 속에서 ‘동생’은 호랑이가 누군가의 어미라는 사실과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던 호랑이가 사람에게 붙잡힌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표제작 「돈 가져간 사슴이」는 모든 어린이가 술술 쉽게 읽으며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다. 한순간 사슴에게 돈을 빼앗긴 주인공의 황당하고 분한 마음에 공감하다가도, 오히려 돈을 잃은 것이 더 좋은 일이 되어 버리는 반전의 묘미를 맛보게 될 것이다.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어린이의 감정과 생각의 근육을 키워 주는 일은 바로 좋은 이야기를 읽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어린이와 어른이라면, 어떤 세상을 마주하더라도 ‘자, 이제 가 볼까?’ 하고 한 걸음 성큼 내딛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참새두 할아버지가 있을까?”
모든 이와 친구 맺고 싶은 어린이의 명랑한 호기심
이태준은 어린이들의 샘솟는 호기심의 원천을 알고 있다. 『돈 가져간 사슴이』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변화를 잘 알아차린다. “보이지 않”고 “향기도 없”지만, 살랑거리는 꽃잎과 파르르 날아가는 잠자리를 보고 “바람이 부나 보지요?” 하며 바람이 거기 있음을 포착한다.(「바람」) 다른 존재를 향한 섬세한 관심, 이것이 바로 어디서든 불쑥 튀어나오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이다.
아가는 호기심이 참 많습니다. (…) 그래서 묻고 또 묻지요. 참새도 엄마 참새가 있느냐고. 꽃은 절로 피는 것이냐고. 참새나 꽃과도 동무로 지내고 싶어서 그런 게지요. 그런 아가의 마음은 세상을 알게 해 줍니다. 「엮은이의 말」 중에서
「몰라쟁이 엄마」의 ‘노마’는 매일같이 듣는 참새 울음소리에도 호기심을 가진다. “참새두 할아버지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수염이 났게?” “그럼 어떻게 할아버진지 아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노마의 질문은 ‘나’와 타인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태준은 한발 더 나아가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일방적일 경우 상대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짚어 준다. 갓 태어난 아기 새가 신기하고 귀여운 마음에 둥지까지 모조리 가져가려던 아이는 새들이 달아나듯 훌쩍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깨닫는다.(「슬퍼하는 나무」) 이때 아이가 어른이 아닌 ‘나무’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 또한 이태준의 작품이 유지하고 있는 미더운 기조이다. 자아가 형성되어 가는 유년의 어린이에게 자신 이외에 다른 이들의 세상도 오롯이 존재하며 서로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부드럽게 전하는 서술 방식에서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이 빛난다. ‘나’만이 아닌 ‘너’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인지, 그렇게 공동체로서 ‘우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인지 이태준의 동화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이유다.
그늘진 곳에서 발견하는 작은 햇빛
슬픈 일이 생겨도 씩씩하게 자라나는 마음
이태준의 동시와 동화에는 외로운 어린이가 자주 등장한다. 생업으로 바쁜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며 “혼자 자는 아가는/눈물이 났”고,(「혼자 자는 아가」) 길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돌아가신 엄마 생각을 했”던 아가는 그림이 지워지자 슬퍼한다.(「길에 그린 사람」) 하지만 작가가 슬며시 놓아둔 햇살과도 같은 희망이 있다. 홀로 잠든 아가를 제비와 바람이 돌보는 장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울컥한 아가가 주먹을 꼭 쥐고 달리는 장면에서 독자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사람들이 오가는 정류장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의 모습을 상상하면 불안하고 걱정스럽지만, 아가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는 어른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엄마 마중」) 어쩌면 그늘진 곳에 드리우는 햇빛은 자연히 비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태준이 뭉근히 장치해 둔 따뜻한 희망의 장면들을 보드랍고 유쾌하게 표현한 박현주 화가의 그림은 책 읽는 즐거움을 배로 더해 준다. 어린이 독자는 물론 어린이 곁에서 책을 읽어 줄 성인 독자 역시 짤막하고 유려한 문장들과 그림을 노래하듯 읽으며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