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명 이선희 시인은 〈쫓기지 말고 새 달을 맞이하며 살자는 뜻으로 2012년부터 매월 첫날에 마중편지를 띄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일상을 소재로 한 자성과 공감의 쉽고 편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만, 그만의 정체성을 살리는 ‘시상의 전개’와 ‘시어의 선택’을 통하여, 독자들이 작품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로 깊이 천착하도록 장치하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신전」에서 〈기쁨과 슬픔은 무(無)로 휘발되고/ 육체와 영혼은 생사 구별 없이/ 소리와 냄새는 파동이 민멸(泯滅)〉되어 세상이 공평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신전을 지어/ 기억을 광원(光源)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그림자〉를 섬겨도 좋으리라 여깁니다. 이는 공평한 세상에서 정서적 광원(발광체)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시심일 터입니다.
#2
지명 이선희 시인은 ‘서시’로 보아도 좋을 「마지막 욕심」에서 내면의 울림과 외부에서 호응하는 ‘공진(共振)’을 찾아 작품을 창작하고자 합니다. 일컬어 자기장에서의 공명(共鳴)과 정서적인 공명의 합일(合一)을 소망하여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삐뚤삐뚤 늘어놓은 갑골문자일지언정/ 밧줄 그네에 나란히 앉아/ 마음껏 흔들림을 희망한다.〉에서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흔들림’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나무도 바람에 흔들려야 잎이 돋아나고, 가지가 벋어나가는 것처럼, 정서적 흔들림을 시상 전개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3
지명 이선희 시인이 추구하는 시(詩) 창작의 바탕은 ‘평이(平易)의 난해(難解)’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잘 모르겠어요.”라면서 ‘보조관념’이 어떻고 ‘객관적 상관물’이 어떠하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이에 그는 〈대들보, 주춧돌은/ 논어와 주역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잘 올리듯이〉 시를 짓거나 이해하는 일이 학문적 깊이와 관계없음을 확인합니다.
〈절 밖의 산문(山門)도 들어가지 못함이요/ 그래도/ 미나리 싹인지/ 이끼 포자인지/ 실실 올라오는 푸른 티를/ 주섬주섬/ 자판으로 주웠습니다.〉에서처럼 일상의 언어와 착상의 기발함으로 작품을 빚습니다. 특히 〈시의 자궁에 착상하지 않은/ 인공수정으로 채집된 싯귀들〉에 대하여 〈이런 것도 시가 되나요?〉 자문(自問)하는 것은 긍정의 새로운 진일보(進一步)라 하겠습니다.
#4
지명 이선희 시인은 시에서의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잎사귀들에도 비유와 상징의 옷을 입힙니다. 작품 「목경(木經)」에서 〈서로 내어주는 공소의 비움이 있다〉에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공소(公所)일까, 빈 새둥지로서의 공소(空巢)일까 잠시 생각에 젖게 합니다. 그러다가 〈가지와 가지가 부딪히지 않는다〉 〈어깨동갑 친구가 있어 잘 자란다〉를 읽으면서 후자임을 깨닫습니다.
〈지구의 터줏대감/ 보살인 그대가 하는 말/ 매일 받아 적어/ 말씀으로 묶어서/ 서먹한 세상/ 갈피 잃고 둥둥 뜨는 날에/ 튼튼한 뿌리 한 줄기/ 분동(分銅)〉으로 남겠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尺]의 눈금을 확인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좋은 작품을 빚게 하는 핵심요소일 터이매, 무릇 시인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여정에 나서야 함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 리헌석 문학평론가의 서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