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기다림’이라는 말은 청소년기를 지난 지금도 저에겐 가슴 떨리는 말입니다. 정진규 시인은 무엇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꿈꾸기’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것은 어디로 ‘다가가기’이며, 그 간절함입니다. 만남을 향한 기다림은 열망이며, 사랑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속으로 되뇌며 연인(戀人)을 기다리는 이가 아닐지라도, 기다림이란 말에 전율이 온다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성성한 이일지라도 청춘이 아닐는지요. 소설가 쓰시마 유코는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쓰시마 유코의 이 말도 그리움의 체득에서 건져 올린 말이 아닐까요? 그리운 마음을 더욱 아리고 애잔하게, 그렇게 기다림은 그리움을 동반합니다.
함민복 시인은 침묵 위에 떠 있던 말들이 침묵 속으로 다시 녹아드는 것도 그리움의 한 표현 방식이라며,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은 다 섬이며 섬에는 그리움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본향을 사모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작디작은 섬들입니다. 이 작디작은 섬들에는 그리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움은 기다림을 애틋하게 하며 침묵을 배우게 합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분은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대어를 기다리고, 취업을 준비하는 취업 준비생은 취직 통보를 기다리고, 예쁜 얼굴을 위해 붕대를 감고 있는 분은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한 내 얼굴을 기다리겠지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산다는 건 그렇게 기다림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기다리되 어떻게 기다리느냐, 그 기다림 자체를 어떻게 채우느냐는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에 둘째가라면 서운한 사람들이죠. 우리만큼 평생 대를 이어가며 기다리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 기다림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 눈물 나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기다림은 또한 속절없이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반칠환 시인은 「어머니 5-검버섯」이라는 시에서, 어머니는 평생 온몸에 남긴 흔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생을 고생인지도 모르고 희생을 희생이라 유난 떨지도 않으시며 그저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 산 넘고 물을 건넌 엄니, 때로는 불 속일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엄니, 그런 엄니가 어느새 넘나들던 산등성이 닮아 허리가 굽으셨고, 야속한 강물 닮아 눈물 괴는 노안이시라. 그 삶을 잘 살아 내신 엄니의 몸에는 흔적이 곳곳에 작물 되어 맺힙니다. 찬란한 황금은 아니지만 아내로서 엄니로서 살아낸 아름다운 흔적, 검버섯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버섯이라. 엄니의 삶의 결실인 검버섯은 누구도 훔쳐가 자기 것인 양 자랑할 수 없는 엄니만의 것입니다. 이 온몸으로 일구신 검버섯밭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군 평생의 흔적입니다. 어디 시인의 엄니만이겠는지요? 우리 모두의 엄니들과 아부지들이 평생 살아내며 온몸을 다해 가꾸어 온 아름다운 검버섯이 아닐는지요.
선생이 아닌 아비가 되기를 원했던 바울도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라고 말씀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전도자로 살아낸 자기 몸에 흔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 몸에 나타난 기다림의 흔적은 만남을 마중합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 내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세월에도 흔적을, 역사에도 흔적을, 급기야 우리 몸에도 흔적을 일구며 살기를 즐거이 감내합니다. 그리고 그 얼굴과 얼굴이 마주 대할 그날의 만남을 손꼽아 소망합니다. 이 기다림은 정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합니다(골 3:2). 그렇게 찬송가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는 늘 들어도, 늘 불러도 가슴 뭉클한 설렘과 떨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흔적을 새기며 이 만남을 마중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을 통해 새록새록 기다림이 솟아오르는 청춘이시기를 말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심판의 날에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읽었느냐에 따라 심문당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행하였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며, 얼마나 훌륭하게 열변을 토했느냐보다는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적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은 그 많은 지식과 박식한 열변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남의 지식으로 학자야 될 수 있다손 쳐도, 우리 자신의 지혜가 아니면 지혜로울 수 없다는 미셸 드 몽테뉴의 말처럼, 남의 인생살이를 아무리 꿰고 있다고 한들 우리 자신의 인생살이는 자기가 스스로 살아내지 않는 한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한 숟가락 더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오지 않는 인생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아낼 용기를 내 보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들이 늙은 칼 바르트를 보고 웃는다. 그들이 그를 보고 웃는 이유는 그가 한 권의 교의학 책에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담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뒤에 한 권의 책이 더 나오고, 그렇게 매번 책이 한 권씩 더 쓰일수록 이전의 것들보다 더 두꺼워진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하지 못한다. 그들은 웃으면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것 좀 봐. 그가 작은 손수레에 교의학 책들을 가득 싣고 오는구먼.’ 또한 그들은 칼 바르트가 쓰려고 했던 것에 관해 쓰지 않고, 그 에 관해서만 많은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고 웃는다. 진실로, 천사들이 웃고 있다.”
세상에 쌓이는 수많은 책 위에 한 권의 책을 더 얹으면서 저는 자그마한 소원을 품어 봅니다. 최승자 시인의 말처럼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다만 이 글이 우리 자신을 우리 주님께 온몸으로 밀고 가 “아멘” 하게 하는 작은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