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마부, 재혼이 자유로운 과부
《고려도경》은 9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읽는 맛이 넘친다. 당초 사절단의 목적은 연려제요聯麗制遼(고려와 연대해 요나 금을 제압한다)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위해 고려 내정을 탐색한 서긍의 기록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려의 속살을 보여주어서다. 개경에 ‘십자가十字街’로 불리는 대로가 있었다든가(137쪽) 궁궐의 승평문 안쪽에 왕과 왕족이, 신하들이 격구를 즐기던 너른 구장毬場이 있었다는(151쪽) 대목은 당시 고려의 성세를 짐작케 하는 풍광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는 선비를 가장 귀하게 여겨 사신들의 말을 끄는 마부도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192쪽) 이복형제나 사촌 간에도 혼인을 하고 배우자와 사별했을 경우 재혼이 자유로웠고 그 자식들도 본처 자식과 차별하지 않았다는(238쪽) 둥 조선 시대와도 사뭇 다른 풍속은 《고려도경》에서만 만날 수 있는 기록이다.
새롭게 다듬고 알차게 보탠 ‘타임머신’
원래 총 40권으로 구성된 《고려도경》은 고려의 역사, 도읍과 궁궐의 구조, 군사들의 종류와 장비는 물론 서민과 여인, 기술자들의 모습, 풍속 등을 29개 항목으로 나눠 촘촘히 기술하면서 그림을 덧붙였다(그러기에 ‘도경圖經’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은이는 《고려도경》의 역주, 해제 수준을 넘어 완전히 새롭게 썼다. 역사로 시작해서 해로로 끝나는 원저의 구성을, 송나라 출발 장면으로 시작해서 서긍이 휘종에게 《고려도경》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식으로 뒤집었다. 여기에 서긍의 면모, 거란과 여진의 부상 등 당대 동아시아의 긴박한 정세에 대한 설명을 더해 독자들이 시간을 거슬러 고려인들의 진면목을 그려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옛 지도와 사진, 연구 성과 등을 참조해서 화가 김영주 선생의 미려한 그림을 삽화 형태로 곳곳에 넣어 《고려도경》이라는 ‘타임머신’의 효용을 더했다.
역사소설 같은 유려함, 인문서다운 깊이
독자 입장에서 더욱 반가운 점은 역사소설을 방불케 하는 유려한 서술이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급수문(손돌목)에 이르러 “급수문은 산골짜기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는데 천둥처럼 요란하고, 쇠뇌가 날아가는 소리나 말이 바람을 헤치고 달려가는 소리라고 해도 그 급한 물살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란 서긍의 감상을 인용하는 대목(118쪽) 등은 역사서가 아닌 문학작품의 향기를 전하는 예다. 여기에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의 당송 대 시인의 작품이나 《설문해자》 등 고전을 적절히 인용해 읽는 맛과 인문학적 지식을 더하는가 하면 사절단의 배를 보여주기 위해 18세기 일본의 그림 〈당선지도〉를 보여주는 관련 자료를 풍성하게 보태는 노력이 더해져 그저 그런 역주본이나 역사 교양서 수준을 뛰어넘는다.
사족: 고려 예종은 ‘벌곡조伐谷鳥(고려 말로 뻐꾹새)’라는 노래를 지었단다(163쪽).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당부했으나 이를 꺼리자 신하들의 비판을 아름다운 뻐꾹새 노래처럼 듣겠다는 뜻이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