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모든 색을 물감 삼아 사진으로 완성할 뿐입니다”
지구별 방랑자, 케이채가 세계를 떠도는 단 하나의 이유
사진들에는 우리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대자연의 낯설고 경이로운 색깔들이 총천연색으로 담겼다. 사막은 노랗다는 편견을 깬 순백색의 ‘화이트 데저트’부터 달빛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비치’, 붉은 조가비로 물든 홍사장(紅沙場), 무지개처럼 층층이 쌓인 ‘레인보우 마운틴’까지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지구의 색깔들이,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수식어에 익숙했던 그동안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케이채의 시선은 늘 인류가 보지 못한 색깔들을 향한다. 물감을 통째로 짜 놓은 듯 선명하고 신비로운 색깔 때문에 종종 사진이 아니라 유화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거나, 구도를 설정한 게 아니냐고 오해받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카메라를 들 뿐이다. 그래서 자주 시간과 우연이 교차한 기적 같은 경험을 한다. 조명이 없어 부르키나 파소의 기암석을 촬영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어디선가 등장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덕분에 완벽한 한 컷을 담기도 하고, 그가 찍은 네팔의 강진 곰파 사진은 얼마 뒤 벌어진 지진으로 인해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곳의 역사적 기록이 되기도 했다. 사진과 함께 쓰인 이런 놀라운 실화들이 케이채가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으로 우리를 순식간에 빨려들게 한다.
『포 어스 For Earth For Us』에는 우리에게 낯선 60여 곳의 장소들이 등장한다. 페로 제도의 물라포수르 폭포나 키르기스스탄의 켈 수 호수, 알래스카의 카크토비크 등은 인적이 드물어 열악하고 위험할 때가 많다. 하지만 케이채는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그가 특별히 용감해서가 아니라, 지구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더 많은 이가 함께 보길 바라는 사진가로서의 신념 때문이다. 해발 5000미터 등반도 두렵지 않은 그의 발길을 뒤따르다 보면, 평생 한 번조차 보기 어려운 핀란드의 오로라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은하수까지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마지막 늑대, 최후의 북극 빙하, 폐허가 된 조지아의 숲…
기후 위기 시대, 지구를 기억하는 가장 감동적인 방법
여행이 금지되고, 인류의 분주하던 생활이 멈춰야 했던 팬데믹 기간은 케이채가 사진가로서 또 다른 신념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제 마음이 급한 이유는 단지 저에게 부족한 시간 때문은 아닙니다. 지구에 주어진 시간 때문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지구상의 아름다운 무언가가 사라집니다.(...)제 사진의 장소들이 오래오래 그 모습으로 존재하기를 빕니다. 누군가 제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 장소를 찾아갔을 때, 나무들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산의 능선도, 하늘의 푸르름도 모두 변함없는 모습으로 새 시대의 사람들을, 사진가들을 환영해 주면 좋겠습니다.”
동식물이 멸종하듯 세계의 모든 색채가 실종되기 전에 이 풍경들을 영원히 보존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이 미학적 성취뿐 아니라 기록물로서의 가치 또한 빛나는 이유다.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에티오피아늑대, 무인도의 빈집, 지구온난화로 녹고 있는 아이슬란드의 유빙 등 케이채가 촬영한 피사체들은 모두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 있지만 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만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혈혈단신으로 방랑하는 낯선 이방인인 그를 아무 조건 없이 초대해 음식을 나눠 준 타슈쿠르간의 노파처럼, 지친 물범에게 기꺼이 벤치를 양보하는 갈라파고스의 주민들처럼 뭉클한 장면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일 수 있게 도와줄 뿐인, 바로 그 자연의 마음으로” 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면 지구의 색깔을 오랫동안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이 지구의 한 컷을 영원히 보존한다는 점에서, 케이채의 작업은 사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기억법일 것이다. 대자연의 화려한 색채, 극한의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뜨거운 열정, 지구를 향한 한 인간의 간절함까지 모두 담긴 가장 감동적인 파노라마가 지금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