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산이 현대사』, 281개의 물건으로 현대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읽다!
전우용의 『잡동산이 현대사』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고 사소한 물건들이 언제 이 땅에 들어와 어떻게 우리 삶을 바꿔놓았는지 이야기한다. 매일 먹는 음식이나 평범한 물건 등 사소한 것부터 건물과 시설, 문서에 이르기까지 281개의 항목을 통해 근현대 한국사를 읽는다.
이 책은 물건의 유입사와 내력을 설명하고 그로 인해 달라진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그려낸다. 다양한 물건들을 통해 한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물건들의 역사와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인의 행태, 습성, 정신 등을 조망하고 생활상과 그 변천사를 살필 수 있다.
■ 작은 물건 하나에 온축된 한국인의 삶과 한국 근현대사
『잡동산이 현대사』는 현대 한국인의 삶과 의식을 형성한 ‘물건’의 역사를 다루지만, 내용과 서술이 미시사적 소재주의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에 유입된 물건들이 한국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만들어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서구화, 식민주의, 산업혁명이 추동한 대량생산과 대중소비, 기술혁신이라는 시대 조건에서 우리 삶에 들어온 물건들은 한국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저자의 말처럼 전등이 없는 시대에서 있는 시대, 냉장고가 없는 시대에서 있는 시대로의 이행은 그 어떠한 역사적 분기점 못지않게 중요하다. ‘물건의 근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 저자 고유의 방법이자 관점이다. 저자는 작은 물건 하나에 온축된 한국인의 삶과 한국 근현대사를 꺼내어 펼쳐 보여준다.
■ 『잡동산이 현대사』 1권(일상ㆍ생활)-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 의식주를 다루다
1권(일상ㆍ생활)은 2권(사회ㆍ문화), 3권(정치ㆍ경제)에 비해 더 미시적인 소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책이 현대 한국인의 삶을 구성하는 물질적 조건을 다루고 있기에 ‘몸’이라는 주제(1장 「닦고 가꾸다」)가 책 맨 앞에 배치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뒤로 의(衣, 3장 「입고 지니다」), 식(食, 2장 「먹고 맛보다」), 주(住, 4장 「생활하고 거주하다」)에 관한 소재들이 뒤따른다. 의식주가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잡동산이 현대사』 전체 책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 이탈리아에는 없는 이태리타올
‘이태리타올’은 이탈리아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목욕용품이다.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름은 사실 궁핍했던 한 시절의 생활상과 사람들의 원망(願望)을 암시한다. 1968년 부산의 김필곤이 이탈리아산 비스코스 레이온으로 마찰력 있는 수건과 장갑을 만들어 실용신안 특허를 얻었고, 곧 전국의 대중목욕탕과 가정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태리타올은 대중목욕탕에 자주 가기 부담스럽고 목욕하기가 어려웠던 우리네 형편과 더불어 유럽산 제품에 대한 당대 한국인들의 동경이 반영된 물건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외세의 침략 속에서 들어온 ‘물건’- 맥주…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이 ‘물건’의 유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경우가 많은 게 한국 근현대사의 특징이다. 1871년 강화도 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에 보낸 조선의 문정관(問情官)은 그들의 의도는 파악하지 못한 채 맥주만 한아름 선물받아 돌아왔다. 이 땅에 처음으로 맥주가 도래한 그 장면은 사진으로 남았다(158쪽).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대맥(大麥) 재배를 장려했는데 일본 맥주회사들에 값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일본 맥주회사들은 그 맥주를 조선에서 판매하여 이익을 얻었다. 이중의 착취 구조였다. 그럼에도 맥주는 ‘개화인의 술’로 인식되었고, 지금 가장 대중적인 주류로 소비되고 있다.
■ 한국인 삶의 구조와 방식을 바꾸고, ‘현대’를 만들다- 온수보일러, 싱크대, 전기 세탁기, 전등, 안경…
저자는 주거 생활의 변화가 가정 내 역할 분담과 가족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온수보일러’는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온기의 평등’을 나눌 수 있게 함으로써 구성원 간 수평적 관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을 거라는 해석이 그 하나다. 1969년 첫선을 보인 싱크대는 남성들을 부엌으로 유도하는 데 기여했으며, 같은 해 상용화된 전기 세탁기로 인해 여성들은 가사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1887년 2월 10일 경복궁에 전등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때를 가리지 않는 발전기의 소음 때문에 ‘건달불’로 불렸던 전등은 이내 밤을 몰아내고 불야성(不夜城)을 선사함으로써 현대인이 쓸 수 있는 시간(노동, 여가 시간 등)을 크게 늘렸다. 1893년 제중원 의사 올리버 애비슨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전, 안경은 몹시 비싼 물건이었으며, 어른에게 안경 낀 모습을 보이는 건 무례한 일로 간주되었다. 안경이 노화와 노인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까지 집 한 채 값에 육박할 정도로 귀했던 안경은 이제 안 쓴 사람이 드물 정도로 흔한 물건이 되었다. “현대인이 근시라는 ‘시대 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안경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