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가지 바다 맛과 사람 맛의 빛깔, 유혹당할 수밖에 없다
“여행객들이 다시 가고 싶은 섬” “섬 주민들이 살고 싶은 섬”을 위해 “섬을 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김준 박사는 ‘무엇이 섬살이의 속살을 잘 보여줄까?’ 고심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바로 ‘섬밥상’이다. 그 밥상에서 섬살이의 지혜를 알게 된다면 그 섬과 바다가 달리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이어온 30여 년의 섬 기록은 당연히 바다 맛의 빛깔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음식이 있고, 이름만 들어서는 도통 어떤 맛인지 상상이 안 가는 음식도 있다.
무엇보다 제철 음식들이 우리의 입안과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가을이다. 국물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겨울바람을 견디며 자란 시금치와 새조개를 살짝 데쳤을 때 달콤함은 봄을 알리는 바로 그 맛이다.” 같은 표현에서부터, 제철 맞아 우리가 알게 모르게 기다리고 있던 그 맛들이 대한민국 바다 곳곳에서 우리를 찾아온다.
그저 신선한 조개만 있으면 되는 ‘상합(백합)탕’이나 ‘가리맛조개탕’, 어장에서 일하다 된장과 열무김치로 쓱싹 만들어 먹던 ‘회진 된장물회’, 이름만 들어도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양미리구이나 박대구이 등은 익숙하지만 참을 수 없는 맛이다.
또한, 보리밥과 투박하니 잘 어울리는 ‘운저리(망둑어)회무침’, 김장보다 더 기다려진다는 ‘물걸이(중하)무침’,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 ‘우미(우뭇가사리)냉국’ 등은 이름은 낯설지만 충분히 입안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음식들이다.
“곡식의 알곡이 실해 고개를 숙이는 가을이면 수컷 꽃게도 종족 번식을 위해 분주할” 때 좋다는 ‘꽃게살비빔밥’과 꽁치구이나 꽁치김치찌개가 아니라 꽁치로 완자를 빚어 만든 ‘꽁치다대기추어탕’, ‘고등어해장국’, 박대껍질로 만든 ‘벌벌이묵’, 깨와 밥을 갈아 걸쭉하게 한 뒤 바지락 살을 넣어 끓인 ‘바지락짓갱’, 굴 껍데기까지 삶아 걸러낸 굴 육수로 만든 ‘피굴’, 감태로 만든 김치 ‘감태지’ 등은 어떠한가? 재료들은 분명 익숙하지만 새롭게 기대되는 맛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말미잘탕’은 완전히 새로운 식재료의 등장이라 할 만하다. 더불어 모자반목에 속하는 갈조류인 뜸부기로 끓인 ‘뜸북국’, 농어목에 속하는 ‘개소겡’으로 끓인 ‘대갱이탕’, 농어목에 속하는 ‘벌레문치’로 찐 ‘장치찜’ 등 역시 낯선 재료이지만, 해당 지역에 간다면 한 번쯤 꼭 맛보기를 추천하는 음식이다.
그리고 언어와 문화 모두 많이 생소하지만 요즘에는 제법 익숙해진 제주의 음식들 ‘각재깃국’(전갱이) ‘객주리콩조림’(말쥐치), ‘멜국’(멸치), ‘빙떡’(메밀떡), ‘자리물회’(자리돔), ‘가시낭칼국수’(종가시나무 열매) 등도 놓치지 말아야 할 지역 특산 음식이다.
결국은 사람에게서 나는 맛이다
김준 박사가 바다 맛을 기록한 이유가 허기만 채우기 위해서, 입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결국 저자가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섬살이’를 하는 ‘섬사람’이었다. 그렇게 섬을 보는 시선을 바꾸고, 모두가 저마다 특별한 섬 하나씩을 마음속에 품기를 바랐던 것이다.
저자는 “단골집은 손맛으로만 찾는 것이 아니다. 더 중한 것이 ‘사람 맛’이다.”(159)라고 한다. 주인을 만나는 맛이 좋아서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들 알 듯이, 사실 이런 경우 손맛은 말할 필요가 없다.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식당에서는 ‘사람 맛’을 느낄 수 있고, 그렇게 재료를 찾는 마음과 손맛이 함께 우러나면 자연스럽게 ‘미식’이 된다.
그렇게 만난 섬사람들에게서 거친 세상을 살아내는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멸치도, 황석어도 상처가 없는 놈은 회로 먹거나 육지로 팔려 나가고, 상처 난 놈은 소금에 절이고는 한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육지여행을 떠난 놈은 조림이 되고, 시간여행을 떠난 놈은 짭짤한 젓갈이 된다.”(158)
또한, 걸러낸 굴장을 큰솥에 넣고 24시간 끓이며 일 년 먹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그 옆에서는 어머님 몇 분이 가을에 시작할 굴 양식을 준비하는데, 그 삶의 지혜를 직접 눈으로 보노라면 절로 숙연해지며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바지락짓갱을 만드는 바지락은 살이 꽉 찬 바지락이 아니라 살이 덜 찬 바지락이 좋다는 얘기에 그런 바지락을 어떻게 찾는지 묻자 나오는 대답은 그저 자연 그대로다. 복숭아꽃이 필 무렵 바지락이면 된단다. 이때 바지락이 육즙도 많고 살도 질기지 않고 부드럽단다. 뭐든 그저 크고 실한 것들만 찾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반전의 묘수다.
이뿐이랴.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팔자 알 수 없’이 귀해진 미더덕, 청어 대역으로 등장했다가 주연이 된 꽁치, 배고픈 시절 허기를 달래주었다가 이제는 귀한 음식이 된 섭 등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없는 인생살이’ 앞에서 조금은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을 배우게 된다.
사라지는 생명과 사람에게 건네는 한 편의 연서
우리에게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아니 이 땅에 사는 사람을 비롯한 뭇 생명에게 소중한 자연,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던 삶의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
‘갯벌, 한국의 조간대’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갯벌들이 그러하며, 앞서 언급한 돌아오지 않는 명태가 그러하다. 갯벌이 사라지고, 바다가 사막이 되고, 그곳을 누비던 생명들이 스러져가면, 그 터전을 바탕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고, 저자가 자주 울컥하게 되는 곳이 바로 새만금이다. 그 새만금의 어머님들은 평생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백합 캐는 그레 하나로 자식을 키웠다. 새만금갯벌은 그레를 들 힘만 있으면 퇴직 없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이었는데, 연금이나 통장처럼 매일매일 찾아 먹던 그 갯벌이 사라지고나니, 백합도 새들도 활기 넘치던 어촌도 사라지고, 집집마다 몇 개씩 걸려 있는 그레는 녹이 슬었다. 그래서 아쉬워한다.
“바다를 잃은 갯벌에 하얀 소금이 올라오듯, 어머님들 머리에 백발이 내렸다. … 어민들 생전에 다시 그레를 들고 갯벌로 나갈 수 있을까. 계화도 어머님이 끓여준 백합죽이 그립다.”(78)
간척과 매립으로 다양한 생명들의 서식지가 사라지고, 불법어구를 사용하면서 수난을 겪으면서 점점 밥상의 단골들을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 서식지와 생명들에 의지하던 또 다른 생명들이 내몰리고, 거듭하여 우리 인간의 밥상도 삶도 빈약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섬밥상은, 섬살이는 어떻게든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반도의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대신 겨울철이면 그 자리에 미거지(곰치), 도치, 도루묵 등이 군웅할거하고 있다. 시원한 국물은 미거지와 도치가 탐내고, 조림이나 구이는 도루묵이 엿보고 있다.”(333)
이제는 사라진 것들을, 사라져가는 것들을 최선으로 살려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갯벌체험을 하며 갯벌을 생각하되, 적당히 채취해가는 미덕을 품어야 한다. 제철 음식을 먹으며 어민들 생계에 도움을 주되, 탐욕이 되지 않게 남획이 되지 않게 그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영등시’에 드러난 갯벌에서 ‘개를 트고’ 혹은 ‘영을 터서’ 정해진 시간에 적절한 양만을 채취하고, 전통어법인 ‘죽방렴’으로 ‘트릿대 채취어업’으로, 또는 ‘호망’으로 슬로피시slow fish(지속 가능한 어업과 책임 있는 수산물 소비)가 강조하는 ‘좋고, 맛있고, 공정한’ 음식을 섭취하려는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화를 이룰 때라야 우리 바다와 섬이 다시 풍성해지고, 우리 밥상과 우리 뱃속이 함께 든든해질 터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밥상에 오른 음식 어느 하나도 빼놓을 것이 없다. 감칠맛 나는 밥상을 어느새 마음속에서 싹싹 비웠다. 그리고 음식을 만든 생명들과 그것을 내준 사람들, 그들이 어우러져 사는 자연의 갖은 사연을 되새기다보면, 어느 순간 울컥하고만다. 밥상이 달리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떠나자. 직접 만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