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정의 이번 시집은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시인이 가담했던 종횡무진에 대한 기록이다. 반토막 난 국토 최남단 강정에서부터 더 올라갈 수 없는 경의선 끝자락까지 온몸으로 밀고 나간 서사다. 이것은 개인적 이익을 앞세운 단순한 물리력 충돌이 아니다. 절망적 현대와 궤멸적 미래 사이 이타적으로 살기 위한 끊임없는 실천과 투쟁이다. 이 싸움은 문명 대 반문명, 자본 대 반자본, 기득 대 기층이라는 극단적 대립에서도 벗어나 있다. 혹은 자연을 우위에 놓고 인간의 반성만을 요구하는 맥락 없는 선언적 생태 시들과 비교할 바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넘어 인간이 지켜야 할 ‘근본에 대한 촉구’이다. - 김명기 시인
사람의 생이 짧지 않다고는 하나 십 년은 긴 세월이다. 십 년을 하루처럼 지순하게, 십 년을 천 년처럼 모질게, 시인은 늘 그 산에 머물렀다. 산은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그저 자연의 흐름대로 꽃피우고 벌레와 새들을 먹이며 무던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산을 대신해 산에 깃든 생명을 염려하고 산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살피느라 한겨울 텐트 한 장으로 바람을 막고 땅바닥에 누워 지샜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와달라 청했다. 그러느라 시도 잊은 줄 알았는데 웬걸. 시인에게 시란 뼈와 내장의 움직임을 읊는 성대와 같은 것이라 이미 시인의 몸이 되어버린 산그늘, 목이 따인 아카시 나무, 불길에 먹힌 꽃들, 손을 타넘는 뱀이 술술 흘러 넘친다. 시의 그릇이 이토록 깊고 그윽한 것은 분노도 실망도 슬픔과 아픔도 삼키고 기어이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랑 때문이리라. 순하고 작고 어리고 말 못하는 생명들에 기어이 기우는 천성 때문이리라. 그래서 시인의 시는 그저 분노도 아니고 그저 슬픔도 아니며 아득히 먼 데까지 닿는 성찰이다. - 이용임 시인
〈활과 리라〉에서 옥타비오 파스는 이렇게 비평했다. 아무도 현대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의 지체가 절단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외과 수술 이전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름발이의 나라에서 두 발로 걷는 존재가 있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몽상가이며 현실을 도피한 사람이다. 세계를 의식의 자료로 환원시키고 모든 것을 노동-상품 가치로 환원시킬 때, 시인과 시인의 작업은 현실로부터 자동적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의 사회적 실존이 상실되어 가고, 시인의 작품이 공적으로 유통되는 일이 점점 희박해지면서, 시인에게는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의 절반과 접촉하는 일이 증가한다. 현대 예술의 모든 과업은 그 잃어버린 절반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에 수록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스스로 상실해 버린 마법사의 기억을 체험한다. 한때 서로에게 놀라운 꿈을 말하면서 손을 내밀던 마법사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가? 환상적인 것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환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