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꽃’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_김 동 현 문학평론가
1. 수직의 맹목이 놓쳐 버린 것들
엎드려야 보이는 것이 있다. 허리를 굽혀서도 아니고 무릎을 꿇어서도 아니다. 중력에 순응하듯 온 몸을 땅으로 향하고, 두 다리와 두 팔을 흙속에 파묻듯, 그렇게 엎드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직립과 부복(仆伏)사이, 낙차야 1미터 남짓할 터이지만 크지 않은 그 차이가 불현듯 한 세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은 수직의 고독에서 내려와 수평의 연대로 향하는 순간이자, 높이를 잃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사유의 시작이다. 흙길을 마다하지 않는 엎드림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의 눈은 수직의 관성이 놓쳐버린 세계와 마주한다.
그것은 갇혀있던 시간의 안주를 끝내는 순간이다. 높이를 포기한 자만이 만날 수 있는 낯선 세계들이다. 숲에서 헤매어본 사람은 안다. 출구는 결국 대지에 있다. 땅의 무늬를 읽을 수 있어야 ‘나’의 공간이 ‘그대’의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폐허의 자아에서 생성의 타자로 건너가는 일은 그렇게 낙차를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눈을 너무 쉽게 믿어 왔다. 우리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던가. 높이를 지향하는 삶이란 결국 수직의 맹목이다. 수평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외통수다. 막다른 길로 향하는 파국이다. 지금 우리는 부박한 삶의 혼돈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시선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속도가 아니라 멈춤의 사유, 즉자적인 맹목의 높이에서 내려와 수평의 사유로 스스로를 낮추는 일. 그것이 오늘을 반성하는 시작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오랜 믿음을 회의해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진보적 전망마저 의심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가 단일한 시간으로 흐르는 기계가 아님을, 우리의 삶이 이질적 시간들로 오히려 충만해지는 하나의 과정임을 각성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시간들을 단일한 리듬으로 획일화하는 것을 진보라고 불러왔다는 지적1)은 그래서 문제적이다. 같으면서 다른, 무한한 차이를 생산하는 삶의 가능성이란, 스스로를 폐허에서 꽃을 피우는 존재로 만드는, 하나의 생산이다.
곳곳이 폐허다. 권위주의가 권위를 박탈하고, 속도가 사유를 삭제하는 시대다. ‘숏츠’로 불리는 콘텐츠의 무한 알고리즘이 오늘을 지배한다. 자본주의의 ‘시각적 플렉스’ 앞에서 기꺼이 벌거숭이가 되는 오늘이다. ‘문학은 쓸모없음으로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평론가 김현의 오랜 지적마저 박제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김수영이 노래했듯 절망이 절망을 반성하지 않는 시대다. 무지가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확증이 되어버리는 시대, 성찰을 모르는 악무한의 시대, 문학은, 시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전망 부재의 오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절망을 알고리즘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가. 그럼에도 시가 하나의 버팀이고 견딤이어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좌절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의 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2. 낮은 땅의 읊조림
김순남의 시편들은 엎드림을 지향한다. 수직의 맹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엎드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꺼이 엎드려야 보여주는”(‘버먼초’ 중) 세계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다. “맑고 투명한 속내”는 수직의 시선이 포착하지 못한 세계이자, 수직의 시간으로는 만날 수 없는 낯선 시간이다. 그 낯섦 앞에서 김순남은 이전과 다른 시선을 획득한다.
그것은 “나라는 이름이/너라는 이름 앞에서/궁극의 길을 묻”는(‘양하’ 중)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김순남이 생각하는 ‘궁극’이란 “나”라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를 온전히 사유하는 것이다. ‘나’만이 강조되는 세상 속에서 낯선 타자를 품는 일은 쉽지 않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세계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불확정성과 불완전성을 감각해야만 우리는 낯선 타자의 세계로 스며들 수 있다. 스며든다는 것은 엎드림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마주침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수직의 시선이 인간의 맹목이라면 수평의 부복은 자연의 시선이다.
우리네 시사적(詩史的) 전통이 자연을 노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순남의 시편들은 우리 시사가 보여준 시선과 얼마간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을 낭만적 대상으로 환원하지 않는 자각이다. 김순남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연을 조화로운 질서를 지닌 낭만적 공간으로 단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김순남은 자연을 무수히 다른 존재가 뒤섞인 오염된 공간으로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오염은 순수의 훼손이거나 질적 변질이 아니다. 조화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인간의 시선에서 사유하는 조화란 결국 인간 존재를 전제로 발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김순남은 여러 시편들에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엎드려 코를 맞대야 눈 맞추게 되는/셋이면서 하나인/하나이면서 셋인 꽃/세상에서 가장 온전한/대지의 만가라네”(‘좀딱취’ 중)라는 구절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하나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셋이면서”, “하나”인, “하나”이면서 “셋”인 꽃의 모습은 과학적 질서로 수렴되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수직의 시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오염의 가능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김순남은 낯선 타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땟자국을” 발견한다.
너를 만나기 위해
서어나무 잎이 누운 숲길을 지나
내를 건너는 것은
살면서 저도 모르게 낀 땟자국을
닦는 일이다
누가 뭐래도 너는
혹한의 고통을 견뎌내고
고난을 건너서 완성된
순진무구한 사랑이다
(…)
그러므로 삶은
강하게 얻는 게 아니라
부드럽고 따스할 때
뿌리가 되는 것이다
- ‘노란제비꽃’ 중
나의 시선을 버려야 비로소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순진무구”로 오염된 또 하나의 ‘사랑’을 만나는 일이자, ‘뿌리’의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가능성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가 말하는 뿌리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이 대지에 붙박혀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깨달음도 아니다. 그것은 수직의 맹목으로 단단해진 삶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는 각성이자, 타자와 기꺼이 오염됨으로써 충만하고 따스해지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아가는 순간이다.
이러한 자각은 자칫 낭만적 감성으로 그칠 수 있지만, 김순남은 끝까지 그러한 태도를 거부한다. “세상에 독초는 없”음을 “어떤 풀도 순하지 않은 것 없”음을(‘천남성’ 중) 노래하는 태도는 그의 시편들이 순수성을 옹호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김순남은 “다시 일어설/뿌리의 힘을 믿는다”고(‘질경이’ 중) 고백할 수 있다.
기꺼이 엎드려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엎드린 이후에 얻는 직립의 시선은 이전과는 다른 감각일 수밖에 없다. “기대지 않고 사는 삶”은 없고, “끼리끼리 내어주고 기대며”, “생의 절정”으로(‘야고’ 중) 향해가는 연대가 가능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오염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얻어지는 하나의 가능이다.
3. 폐허를 가능으로 바꾸는 오염의 상상력
남방계 어느 먼 마을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다만 나의 뿌리는
서귀포 야산 볕바른 언덕이
북방한계선이었을 뿐
엉겅퀴 마타리 등골나물 우북한 띠밭에서
뒤꿈치를 치켜세워도 2센티
아침 해 그림자를 지우는 정오면
꽃잎을 닫고 밤은 길었다
무수한 소멸을 지나
모지오름 풀밭에 뜬 노란별수선
크고 순한 소들의 눈망울과 노루와 꿩알
설레고 떨리는 시인의 가슴을 품었지
연두빛 자자한 오월의 꽃 문 앞에
트랙터 거대한 바퀴로 흙먼지를 일으키더니
몇 날 며칠 벼락같이 똥물은 퍼부어지고
부지불식 사라지고 지워진 건초더미 아래서
다시 마주할 시원을 위해 나는
깊은 땅에 엎드려
노란 꽃물의 시를 쓴다
-‘노란별수선’ 전문
땅에 기꺼이 엎드려 김순남은 “남방계 어느 먼 마을”에서 온 연약한 뜰꽃을 만난다. 아무리 곧추세워도 “2센티”인 존재.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들꽃. 직립의 시선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그는 “설레고 떨리는” 가슴으로 타자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주체가 되어 대상을 품는 독단과 독선이 아니다. ‘너’라는 존재가 온전히 품어주고 스며들어야 가능한 합일이다. “트랙터 거대한 바퀴”가 “흙먼지를 일으키”고, “몇 날 며칠 벼락같이 똥물은 퍼부어지”더라도 다시 꽃이 필 것임을 그는 믿는다. 오염된 땅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 존재를 그는 “다시 마주할 시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꽃이 되어 “노란 꽃물의 시를 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이 ‘-되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무한한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순간이다. 폐허를 하나의 가능으로 바꾸는 오염의 상상력이다.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내’가 된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로 스며들고, 오염을 감수하면서 김순남은 무수히 많은 존재의 시간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단지 자연으로 환원되는 감각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자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만드는 힘이다.
바람 한 줌 들지 않고
햇살 한 모금 내리지 않는 곶자왈에
키 크고 무성한 잎들이
네게는 캄캄한 밤일 수밖에 없었다
숨비소리 땅속에 콱콱 눌러 박고
애면글면 포자낭엽 만들어
무성에도 자손 일으켜 살만해 가는데
이 무슨 사나운 광풍이란 말인가
도틀굴 목시물굴 반못 벵디굴 억물에
피토하는 주검의 바다를 건너며
이 땅의 시원으로 살고 싶었다
작다고 깔보지 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잡풀대기가 아니다
내가 곧 주인이요 역사요 평화다
- ‘제주고사리삼’ 전문
“무성에도 자손 일으켜 살만”한 ‘제주고사리삼’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다고 깔보지 마라”라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잡풀대기가 아니”라고. 인간의 생존은 결국 유성 생식의 한계를 반복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산출하는 동어반복의 삶. 하지만 모든 생성이 유성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성의 존재도 끊임없이 생명을 창출할 수 있다. 삶의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질적이고, 낯선, 불완전한 순간들로 가득한 시간들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것은 세계가 단일한 시간으로 규정되지 않음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네 삶 자체가 수많은 다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자각이 무성의 삶을 또 다른 생성으로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김순남은 제주고사리삼을 보면서 “도틀굴 목시물굴 반못 벵디굴 억물에”서 “피토하는 주검의 바다를”를 상기한다. 제주 4·3을 아는 이라면 그것이 1948년 11월 무렵 조천읍 선흘 일대에서 벌어졌던 대학살의 비극임을 쉽게 알 수 있다. 1948년 10월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이후 중산간 일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대학살이 벌어졌다. 4·3당시 학살의 80~90%가 그 기간에 집중되었다. 선흘리 주민들은 그 무차별한 학살의 대상이었다. 제주고사리삼이 그 시절 죽어간 수많은 죽음으로 변모하는 순간, 제주고사리삼은 다른 존재의 시간으로 옮아간다. 그것을 그는 “주인이요 역사요 평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이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자, “역사”로, “평화”라로 바꿔 말하고 있는 이 대목은 김순남이 기꺼이 땅에 엎드려 획득한 시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 상리공생(相利共生)의 이야기
김순남은 땅에 깃든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직립의 시선을 버리고 부복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편들이 식물로서의 야생화만 말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창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엎드려 온 몸이 흙으로 뒤덮이더라도 그는 끝내 엎드림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릇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 상리공생(相利共生)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시적 버팀이다. 불현듯 나타난 세계를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야 하는 다종다기한 세계의 왁자지껄. 그것은 다성(多聲)의 수다이자, 동시에 말하되 그 무엇도 타자의 언어를 억압하지 않는 공존이다. 복수(複數)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목소리들의 개화이다. 그 수많은 개화 앞에서 우리는 다른 세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 낯선 조우를 김순남은 기꺼이 감수한다.
낯선 존재들을 만날 때, 수직의 맹목이 삭제해 버린 시간들을 마주할 때, 비로소 생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단일한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차이를 만들어가는 다름의 생성이다. 무한한 차이를 생산하는 역동이란 우리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단일하지 않다는 자각에서 가능해진다. 엎드려야 겨우 보이는 꽃들과 마주하면서 김순남은 지금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숱한 다름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엎드림은 수직의 오만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자, 이질과 교란으로 가득한 세계를 만나기 위한 생성의 자각이다.
그것은 엎드린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가능이자 창조이다. 엎드려야 보인다. 엎드려야 우리는 다름을 지향할 수 있다. 수직으로 치솟는 상상으로는 끝내 담을 수 없는 존재들. 수직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했던 우리의 교만이 엎드림의 시선 앞에서 비로소 겸손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던가. 맹목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달려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온전히 다른 존재로 뛰어 들어간 순간들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가지 않은 길들을 가야하고, 오지 않는 시간 속으로 추락해야 하는지 모른다.
수직의 맹목을 추종하는 세태다. 높이를 욕망하는 것이 당연한 세태이다. 주식과 코인을 좇는 몰두가 이상하지 않다. ‘무엇을 보는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부끄러움조차 낯선 단어가 되어 버린 지 모른다. 이 모든 폐허에서 김순남의 시편들은 그럼에도 생성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김순남의 시편들을 읽는 일은 지금 우리를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지 모른다. 그것은 지금의 태도를 묻는 질문이자, 지금의 윤리가 무엇인지 던지는 물음이다.
낮은 눈을 지닌 자가 만날 수 있는 낮은 세계. 그 수많은 세계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의 힘들이 있기에 수직의 정점을 반성할 수 있다.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는 그 겸허의 시작이 그가 만나는 엎드림이며, 그가 만나는 대지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그가 만나는 꽃들이란, 꽃들의 세계란, 결국 땅에 깃든 이야기일 터. 이야기는 우리에게만 있지 않고, 삶은 수직의 꼭짓점에서만 피는 것도 아니다. 김순남은 그 자명하면서도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땅꽃’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