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지배 체제 내부로 깊이 들어가고자 했던
조선시대 사족들의 서원문화와 그 활동
『조성당일기』에 기록된 내용 중 매우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는 당시 조선시대 사족들을 연결하고 때로는 그 지위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서원문화다. 김택룡은 낙향 후 후진을 양성하고 스승인 월천을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일을 추진했다. 조선시대 서원에는 당시 학문 발전에 공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를 주향(主享, 위패를 정면에 놓는 것)하여 모셨는데, 이때 제향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선비들의 공론에 따라 국가가 선정했다. 따라서 서원이 사액賜額 받게 되면 해당 서원의 제향자는 물론 그 서원이 위치한 지역, 서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대대손손 그 혜택과 명예를 누릴 수 있어 이는 당시 사족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김택룡은 자신의 스승인 월천을 퇴계의 문인 중 유일하게 도선사원에 종향하는 데 성공했고, 이 ‘월천 종향’ 사건을 통해 그는 원래 그리 높지 않은 신분으로 정계에 진출한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퇴계학파 비월천계 인물들과는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조성당일기』에는 조성당 김택룡이 살았던 16~17세기, 조선 개국 이래 서서히 형성되어 온 사족사회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사족이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로서 경제적 기반을 잡고 이를 혈연과 혼맥을 통해 결집·확장하며 나아가 학맥을 통해 지역사회와 중앙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장해가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경제생활과 교유 관계, 여가 활동과 산수 유람…
현대의 학문적 도구를 바탕으로 복원된 향촌 사회 속 양반의 모습
『조성당일기』에는 여타 공적인 기록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사적인 공간에서 영위된 조선시대 사족의 ‘사적인 삶’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일기에는 살림의 근간이 되는 농사를 점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자주 등장하는데, 언제, 노비 누구를 시켜 밭을 갈고 파종했는지, 전토田土 구매를 위해 어디를 다녀오고 또 어떤 조건으로 거래했는지와 같은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스승 월천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은 대부인에게 드리기 위해 손수 꿩 사냥을 해 문병하며 이후 대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조문하는 과정, 아버지와 장인의 기제사에 제수를 준비해 아들, 손자, 조카 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다른 친지들과 모두 모여 제삿밥을 먹는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학문과 문예활동으로서 중국 서적을 구입하고자 할 때에는 어떤 경로로 얼마의 삯을 주고 어떤 책을 구입했는지 등도 소상히 적혀 있어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또한 김택룡은 산수 유람을 즐겼는데, 청량산이나 소백산 등을 다녀온 뒤에는 반드시 그 기록을 한시로 창작해 남겼다. 그는 문장을 짓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고, 아들을 비롯해 이 지역 아이들에게 한시 창작을 강조하고 작법을 익히게 하거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즉석으로 시 짓기도 즐겼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조성당일기』는 의성 김씨 한곡파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일기국역총서’ 간행위원회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2010년 국역이 완성된 지 13년이 지나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통해 세밀하게 분석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 속에 숨어 있던 조성당 김택룡의 삶이 드러나면서 그 시절 향촌 사회 속 양반의 모습을 한층 생생하게 복원한 것에서 성과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