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의 사계절이 온전히 그려지는 45편의 시
슬픔이 묻어나는 감미롭고도 아름다운 노랫말
한계령이라는 지명은 한계(限界)가 아닌 한계(寒溪)로 한자표기를 해야 하는 고갯길, 령(嶺)이다. 한계(限界)란 말은 어떤 대상, 아니 대부분의 사물이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범위나 경계로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 이미 알고 있었다. 더러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저지당하는 느낌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 한계(寒溪)는 막히거나 끊기고 단절되며 저지당하는 운명이 아니다. 끝없이 이로운 물길들을 만나 서로 섞여 어우러지며 도도히 흐르기 시작하는 차가운 시냇물을 이른다.
오색(五色)으로 불리는 마을은 이 땅에 단 한 곳뿐이다. 오색나무가 마을에 자라서 오색리로 불렸는데, 이 나무는 키가 작았고 마을에서도 지금은 숙박시설이 들어선 자리를 따라 흐르던 아주 작아 골짜기라 부르기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도랑 가에 있었는데 1970년대 모두 사라졌다. 바로 그 마을에서 시인은 태어났고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시인은 머리말에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저 잡초에 불과한 풀도 꽃을 피운다. 구절초, 쑥부쟁이, 질경이, 졸방제비꽃, 한계령 풀, 구름송이풀 등 모든 들풀마다 고유의 이름을 지녔지만 제대로 모르면 그저 풀이고 잡초가 된다.
들과 산에서 만나는 모든 풀의 이름을 배워 부르며 시로 쓰고, 글로 풀어가며 살고자 했다.’라고 썼다.
한국PD연합회장과 광주MBC 사장을 지낸 송일준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대라고는 해도 소년은 처참하게 가난했다. 배가 고프면 오색약수로 배를 채웠고 공부가 하고프면 설악산 줄기들을 탔다. 한계령에 올랐다. 세상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한 줄기 바람처럼 떠돌고 싶었다. 산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어깨를 떠밀었다. “때가 될 때까지 네게 주어진 세상을 살아 내거라.”
눈물이 났다. 진작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년의 가슴에서 오색약수처럼 시가 퐁퐁 솟아올랐다. ‘저 산은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시는 노래가 되었다. 지치고 힘든 이들을 위로해주는 슬프면서도 따뜻한 멜로디.
지치고 힘들 때면 시인의 시집을 들고 한계령에 오시라.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슴을 쓸어주고 어깨를 토닥거려줄 따뜻한 품이 여기 있다.’
이생진 시인은 추천사에서 정덕수 시인과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해발 1400m에서 1700m 설악산의 산 능선마다 어디에 어떤 산나물이 자라는지 안다는 정 시인의 안내로 굽잇길을 달려 한계령을 오르고 차를 나누었어요. 다시 그의 고향이라는 오색마을에서 정 시인의 토박이 친구가 직접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었지요.
동행한 이들과 같이, 일찌감치 숙소를 정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난 다음 찾아간 “낙산사 뒤쪽이라 후진(後津)으로 부른다.”는 작은 포구 횟집에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산삼도 보았나요.”라고 정 시인에게 물어보더군요. 궁금증에 그가 하는 대답에 저절로 귀를 기울여 듣게 되더군요. 예전엔 산삼이라 하면 정말 진귀한 영물이고 산삼 하나로 팔자를 고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설악산에 사는 정 시인이 과연 그런 산삼을 만났나 싶었지요.
해발 1000m 지대에서 처음 산삼을 산나물을 채취하다 만났고, 얼마 전에도 1600m 지대에서 다시 몇 뿌리의 산삼을 만났다는 그의 대답과 함께 우리 일행들은 산의 내음이 물씬 나는 얘기를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었네요.
그러고 보니 그날 일몰을 맞춰 찾았던 후진항 방파제 바로 앞 횟집은 제법 오래전 낙산 바닷가에 세워진 황금찬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 갔을 때 정 시인이 안내했던 곳이더군요. 세월이 흘렀고, 몇 사람 일행은 바뀌었어도 그나 나나 여전히 시를 얘기하고 잠시나마 같은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정 시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으로 시 한 편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날 하루 일행들을 안내하는 정 시인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에 들려주었던 〈한계령〉이란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과 동기를 통해 오색리가 고향인 정덕수란 한 인물이 살았던 기록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 썼다는 「한계령」이 그의 나이 18살 시절이라면 그 이전부터 이미 많은 시를 썼다는 얘기인데 그 궁금증은 그가 저에 대한 기억으로 들려준 얘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70년대 말 어느 해인가로 기억되는데 가을이 시작되기 전 장충단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보리수 다방이란 곳에서 몇 분의 시인님들과 함께 계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드러냄 없이 조용하면서도 나이 어린 후배들을 배려하시는 겸손하신 모습에 더 많이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고, 그 뒤로도 여러 곳에서 선생님의 변함없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정 시인의 얘기로 미루어 19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여러 자리에서 만났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가 나를 닮고 싶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최근에도 거푸 두 번 인사동에서 만났는데 멀리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정 시인에게 “시 많이 쓰세요.”라 했던 인사가 이렇게 다시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인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반가운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당부하니, 아름다운 고갯길 설악을 찾을 때는 정덕수 시인의 『한계령』을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설악의 품에 안겨 바다를 만날 때도 시집을 꼭 품에 안고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