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작은 창문!
4부로 구성된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는 시인이 일상에서 매순간 마주하는 삶의 모습을 47편의 작품으로 담아낸다. 1부의 시들은 유년기에 잃어버린 ‘귀(청력)’를 향해 있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물에 잠긴다는 것」)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득하고 막막한 시공간에 놓인 어떤 존재와 “내”가 어떻게 소통하고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럴 때 시는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작은 창문이 된다.
박상봉 시인의 시는 세상과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파장의 화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시에는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비밀을 엿보고 알아차리고 깨닫는 기쁨은 만만치 않다.
2부 이후의 시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과, 그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세상을 표현해낸다. “빗속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 젖은 발목이 더 젖어 슬프기도 한 여름”(「여름비」)은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투명함 속에서 “물 밑으로 가라앉은 숫자들은 / 저녁이 되면 별이 되어 떠오”(「알츠하이머의 집」)르고, 이렇게 떠오른 별은 시인의 손끝에서 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 별은,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유년의 기억이다.
투명한 언어로 빚어낸 일상적 삶의 진실!
새집으로 이사 들어가는 날, 버리고 온 낡은 책상과 장롱, 정든 옛것을 생각한다. 새것들이 번듯한 집과 구색 맞춘 듯 어울려 보이지만, 쉬 정들지 않는다.
되짚어보면, 알지 못하는 사이 내가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때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진 사람은 지금 어디에? 젊은 날 놓친 기차, 기차 놓치지 않으려 서두르다 역사에 두고 온 가방, 그것들은 이제 알아볼 수조차도 없을 만큼 색이 바래졌겠지.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려고 화물을 내던지듯 버릴 수밖에 없던 것들, 어느 때 어디서 흘려버렸는지 알 수 없는 그냥 지나친 무릅나무, 으름꽃, 산싸리, 고마리, 닭의장풀, 금계국, 바위취, 설앵초, 병꽃 등과 문장으로 남기지 못한 가여운 것들,
모든 기억, 그 흔적이 상함의 단단한 껍질 뒤집어쓰고 언젠가 누추한 몰골로 찾아와 창문 두들기며 큰 목소리로 떠들어댈는지도 모른다.
새집으로 이사 들어가는 날처럼, 버리고 온 것 중 하나가 속내 흔들어놓듯
-「내가 버린 것들」 전문
“새집”으로 이사 들어가면서 버려야했던 “정든 옛것”들, 그러니까 “모든 기억, 그 흔적”들의 “색이 바래졌”지만, 그럼에도 끝내 시인의 “속내 흔들어놓”았던 것들은 고스란히 시가 되었다. 시인이 ‘새집’으로 들어가느라 버려야 했던 것들이 “누추한 몰골로 찾아와 창문 두들”길 때, 그것들을 ‘시집’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물속에 두고 온 귀』에 수록된 시들은 “시절이 다 가도록 다시 꽃피지 않는 집 앞의 사랑나무 / 어둠으로 뒤덮인 마을과 길을 잇는 불빛 아래에서”(「유년시첩」) 꼭꼭 눌러 적은 간절하고 뜨거운 고백록이다. 그 고백록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을 짓는다 나는 주소를 모른다 꽃밭을 만든다 (…중략…) 결별한 어제를 빨아들이고 시냇물을 빨아들이고 싸리꽃 흙길을 빨아들이고 혓바늘 돋는 문장의 거친 호흡으로”(「태양 속 아이들」).
시인은 잃어버린 시절의 기억으로 집을 짓고 “결별한 어제”를 “혓바늘 돋는 문장의 거친 호흡으로” 뜨겁게 받아 적었다. 시인의 내면에서 오랫동안 “갈 길을 잃어 불안한 꿈들이 / 혈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 꺼내어 들고 찾아가는 곳”(「물의 나라로」)은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에 깃들어 있는 세계이다.
이 시집을 펼치면, 박상봉 시인이 투명한 언어로 빚어놓은 일상적 삶의 진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비밀스런 세계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모습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