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우린 전체가 부분의 집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부분들의 집합이 전체다. 다수에 대한 제논의 역설(Paradox of Plurality)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제논에게 전체는 부분(다수)들의 집합 이상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양화(量化)할 수 없는 잉여의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든 부분은 전체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수학적으로 부분의 합은 기껏해야 전체의 일부라는 얘기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춘다’라는 불교적 의미의 ‘월인천강(月印千江)’적 인식도 이런 전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부처의 가르침이 달빛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들어 있다는 교리는, 모든 부분들 속에 전체가 함유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낱낱으로 존재하는 ‘천 개의 강’은, 그 어떤 주체성이나 자립성도 없는 전체로서 ‘하나의 달’의 단순 반영체에 불과하다. 그 낱낱의 강들은 저만이 가진 흐름의 우발성이나 굴곡의 예외성이 인정되지 않는 하나의 전체로 전락한다. 그저 ‘달빛’을 곧이곧대로 비치는 수동적인 객체이자 한낱 특색 없는 부분들의 집합체로서 존재할 뿐인 게 ‘천 개의 강’이다.
하지만 거대한 군집을 이루며 한날한시에 일제히 피어나는 꽃들을 보자.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서로의 색깔과 모양, 키와 향기가 다 다르다. 비록 한 덩어리로 묶여 장엄하고 신비한 풍경을 연출한다고 해도, 각기의 꽃들은 저마다 비교 불가능한 우주를 품어서 아름답다. 달리 말해, 한 그루의 꽃이나 하나의 강은 단지 어떤 불변의 전체 또는 어떤 본질을 성립시키기 위한 기계적 부품이 아니다. 특히 그것들은 모든 것을 넘어서고 모든 것을 포용하고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위한 하위존재나 종속물이 아니다.
짐짓 비가시성 때문에 곧잘 무시되거나 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쉬운 각기 개체들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면 놀랍게도 우린 각기 개체들이 또한 그만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가진 존재로 분절과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아주 작은 차이지만 소중하고 진정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이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그럼으로써 우린 각기 다른 개체들은 저마다 무한의 속성이나 질서를 품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전체로서 수직적 위계질서((hierarchy)인 상위의 보편자에 귀속시킬 수 없다. 특히 모든 부분을 전체의 합을 위한 요소로 여기거나 전체와 부분의 일체성에 대한 강조는, 본의 아니게 존재론이고 인식론적인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어떤 공통의 척도로 잴 수 없는, 부분으로서 각 개체들이 지닌 무한성에 대한 일종의 조롱이자 모독의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누군가에겐 어느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희미하지만, 저마다 너무도 큰 가치와 존재 이유를 가진 부분들에 대한 철저한 무시이자 무화의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최근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피 흘리는 전쟁이 그 단적인 증거의 하나다. 그 원인이야 어쨌든지 이들 간의 건널 수 없는 적대적 사건은, 우리가 여전히 참혹한 세계적 조건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우리가 그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실존의 고통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다. 전체화할 수 없는 부분들의 동일화로 일어나는 폭력적 비극이다.
시집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의 저자는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젊은 날 그는 ‘전체는 무엇이고, 부분은 무엇이냐’는 일생일대의 화두에 붙잡힌 바기 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1980년 5월의 어느 날 불타오르는 광주 MBC 앞에서였다고 한다. 앞으로 함께 나아갈 땐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조직처럼 보였지만, 저자의 눈에 밟히는 건, 물러날 땐 마치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성난 시위 군중을 보면서였다. 그리하여 임동확 시인은 “나는 과연 지금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역사의 진리는 무엇이고, 특히 군중들의 실체를 무엇인가란 그런 의단(疑端)에 사로잡힌 바가 있다”라고 말했다.
시집 제목이기도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라는 저자의 무모한(?) 선언은 이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마치 ‘잔디 깎기’처럼 모든 것들을 규격화하고 평균화하는 근대적 폭력의 세계 속에서 설령 그게 잘못된 논리적 판단이나 오류로 판명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