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에서 회억하는 역사 속 ‘그날’들
부여, 옥저, 고구려 그리고 발해까지 지금의 연변 땅에는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묻혀 있다. 그중에서도 시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발해 역사를 회고한다. 발해 제3대 문왕의 딸 정혜 공주의 묘소를 찾은 시인은 “정혜 열여덟 스무 살 즈음에는/어떤 그리움에 뒤척였을까”(「정혜 공주와 거닐다」) 자문한다. 또 “1922년부터 1945년까지 크작게 다섯 차례나 왜놈들 손을/탔다”는, “찌그러진 깡통같이 차이는”(「중경성 엉겅퀴」) 발해 옛 도읍의 모습은 후대에게 발해 역사의 한 파편을 전해 준다.
한국이 국권을 강탈당했던 시기, 연변은 광복 운동의 성지였다. 연길 마반산에서 시인은 “장군”이자 “초인”으로 이름 떨친 “구미 선산에서 태를 받아 1942년 초여름/만주벌에서 숨을 지운 서른셋”(「마반산을 달리다」)의 독립운동가 허형식을 떠올리고, “왜놈 영사관에 끌려가 눈알을 뽑히고 간까지 잃은 뒤/그 참상에 양잿물로 숨을 끊은” 항왜투사들을 “핏빛 노을의 흑점”(「잠자리 날아 나온 곳」)의 기억으로 추모한다.
▶ 연변 이민자가 풀어놓는 생애 굽이굽이
186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은 만주를 중국 관내의 병참 기지로 삼기 위해 한반도로부터 대량의 “개척민(开拓民)”을 들여왔다. 그러나 “말이 좋아 개척이지/항왜 반만 광복군 기세 싸그리 태우고 지우기 위해/엮고 처올린 이른바 개척민 마을”로 이민 와 낯설고 물선 연변 살이는 녹록지 않다. “고향이 그리워 울고 배가 고파 울고/약 한 첩 침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죽은 핏줄 상여에 실어/보내”는 “타향살이 설음”(「깽그랑 깽깽 문 여소」)을 농악과 탈춤으로 잊어 보기도 한다.
한 개척민은 연변 조선족으로서 연변 땅에서 살아온 세월을 구구절절 소상히 읊는다. 이들은 “박달나무도 쩍쩍 갈라지는 추위”에 “1947년돈가 1948년도에는 장질부사”를 겪고,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전쟁”이 터지기도 앞서 “벌써 조선에 다 나가 매복해” 동족상잔이라는 비극마저 겪는다. 굶주림과 전염병,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조선’이 아닌 ‘한국’을 오가며 지난 세기 고난을 기구한 운명 아래 덮어둔다. “아버지는 여기서 산소 내고/우리는 이제 묘 안 써/날리삐야”(「내가 지은 옥수수는 고개 치벋고」)겠다는 조선족 사내의 말에서, 뼛가루처럼 그들의 역사 또한 훗날 흩어져 없어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깃든다.
▶ 조선바람 한국바람, 정체성과 유대의 끈
1960년대 초반부터 중국의 조선족 사이에서는 이른바 ‘조선바람’이 크게 불었다. 당시 대약진 운동과 농촌의 집단 농장화 등으로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진 이들은 조선으로 건너와 장사를 하고, 학업에 매진했으며 때로는 망명지로 조선을 찾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바람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바람’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로 넘어와 한중수교 이후 거세진 한국바람에 “수원 평택으로 아들 며느리 떠나고” 중국에 남아 “두 손자 재울”(「점등」) 조부모의 황혼 육아는 연변 조선족 가족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이 되었다. “지금 마을에 조선 사람 마이 삽니꺼”라는 시인의 물음에 한 조선족은 “몃이 업소 다 한국 갓소”(「저 낭기 내 기요」)라며 한국바람으로 인해 공동화(空洞化)되어 버린 쓸쓸한 농촌사회를 알려 준다.
조선바람에서 한국바람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연변 나그네와 안까이들의 생활도 변화한다. 이제는 “사드 탓에 사단이 난 걸까/서울 텔레비전 가마가 끊겼다”며 한국 방송을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이들. “와이파이만으로 한국 생방송”(「사드를 위하여」)을 챙겨 보는 그들의 정체성은 과연 중국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 방송 시청이 일상의 활력이 된 조선족의 모습에서 연변 조선족과 모국 사이의 정신적 유대는 시간이 흘러도 녹슬지 않고 여전히 이어져 있음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