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먼 탐색이 담긴 시적 여정을 깨우는 작품은 독자도 오래 당긴다. 많은 시인이 혼자 가만히 뇔 법한 탄식의 순간과 무언의 행간 등이 더 많은 말을 건네는 까닭이다. 그렇게 악보에 싣지 못하고 무음으로 간소하게 응축한 시편이 공감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은 간명한 구조를 살리는 매력이다.
그렇듯 작품에 깊이 머물게 하는 흡입력에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김소해 시인의 경우에는 고백의 응축이 크게 기여하는 듯하다. 얼핏 보면 간명한 소묘 같은 구조인데 볼수록 시적 농축이며 깊이의 문양이 달리 번지는 것이다. 그런 작품 중에 「찔레꽃 명당」은 김소해 시인의 무수한 속말과 속생각을 담아두고 발효시키는 시적 ‘명당’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봄밤’의 소회라기엔 아주 긴 시간이 담겨 있고, 바람에도 “필생”의 바람[願]이 함축돼있기 때문이다.
보름의 달밤인데 찔레의 봄밤인데
늦도록 늦은 밤 나는 아직 길에 있네
몰라라, 얼마나 멀리
언제 그렇게, 그러게
시냇가라 했던가 바닷가 어디쯤
정자 하나 짓겠다고 필생을 다 놓치네
바람도 잠들지 못 한 길
서너 백년 기다릴게
-「찔레꽃 명당」 전문
머나먼 시적 탐색과 고단한 여정이 짚이는 작품이다. 그냥 평범한 ‘봄밤’의 소회라기엔 아주 긴 시간이 담겨 있고, 깊은 함의인 “필생”의 바람이 담보된 까닭이다. “찔레의 봄밤”인데, 그것도 “늦도록 늦은 밤”인데, 왜 “나는 아직 길에 있네”라는 탄식이 터지는가. 무엇을 그토록 찾아 나섰고, “얼마나 멀리” 왔는지, 길게 돌아본 후 나직이 뇌는 말은 “몰라라”다. 그 한숨 실린 탄식을 오롯이 받아든 게 둘째 수의 “정자”, 시인이 평생 찾던 무엇 곧 시의 은유라 할 것이다. 이보다 큰 의미의 이상향 혹은 영혼의 처소로 볼 수도 있지만, 시인의 입장에 유념해 보면 필생 찾아 헤매는 최상의 시적 거처일 가능성이 높다. 흔히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없다’라고 일러온 말 즉 다 좋을 순 없다는 인생의 깨달음보다 시적 추구와의 연결을 환기하는 시인의 여정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정자 하나 짓겠다고 필생을 다 놓치네”라는 문장의 공명도 시적 울림이 더 깊어진다. 현실 속의 정자야 마음만 먹으면 지을 수 있지만, 정자를 “필생”의 시적 궁극으로 치면 얼마나 멀고 높은 거처인가. 그래서 “바람도 잠들지 못한 길//서너 백년 기다릴게”의 여운 또한 더 길고 깊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시편에 목을 매듯 찾고 기다리고 골몰하는 마음은 때로 일을 내기도 한다. “세 줄짜리 시 쓰느라 냄비를 태워버렸네//공들기로 치자면 석 줄이나 열 줄이나//아무리//헐하더라도//냄비값은 되려나?”(「이것!」) 이런 정도의 몰입이 바라는 작품에 고료까지 나온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만, 글값이 대부분 헐값인 판이니 “냄비값”도 고급에는 턱없는 값일 테다. 하지만 절창만 얻는다면 무슨 값이 대수이랴. 비록 냄비는 태웠지만 단수 한 편을 얻었으니 시인도 웃어넘길 다행으로 여긴 후편이 아닐는지. 무릇 쓰는 자라면 웃을 수만은 없는 이 콩트 같은 소회 역시 쓰기의 자세를 일깨운다.
여기서 문득문득 되짚는 말을 다시 꺼내 본다. “자기 창조와 재창조는 모방한 형식과 새로운 형식 사이의 투쟁”에서 나오는 것, 특히 “자동성에 굴복 말아야”(파스칼 브퀴르네르) 한다는 전언을 깊이 새겨본다. 시조라는 정형성의 조건이 자칫 자동성에의 굴복 같은 안주로 이어질 우려를 지닌 까닭이다. 쇄신의 명제가 더 어려운 정형의 미적 쇄신, 그것은 한 권의 시조집을 묶을 때마다 더 크게 더 많이 보인다. 이전의 시조집에서 얼마나 새롭게 깊어지거나 넓어지거나 나아가고 있는가. 그런 질문이 끝까지 자신을 괴롭히며 다음 여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서너 백년 기다릴게』는 그런 고뇌 어린 여정에서 길어낸 김소해 시인의 가편들을 보다 깊이 보여주는 시조집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들이나 그늘이 물든 소리의 뒤를 따라 거닐며 시인의 발견과 발화를 함께 즐겼다. 하지만 이런 작품보다 더 풍성한 시인의 모색과 발화가 있으니, 그런 편마다 많은 기울임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깊숙이 귀 기울이는 가슴들과 더불어 더 그윽한 울림이 이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