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
40여 화폭이 한 책 안에 펼쳐져 있다. 세계 유명 화가들의 성경 명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독자는 호강을 넉넉히 누린다. 성경 본문이 일찍이 화가에게 녹아들었다. 그것이 화가의 상상력과 만나 저마다 독특한 구도와 색채로 재구성되었다. 시각화된 본문이 독자에 따라서는 청각을 거쳐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말씀을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한 이들을 저자 김기석 목사는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이라고 일컫는다. 평생 말씀에 사로잡혀 설교를 통해 청중과 독자를 신비한 성경의 세계로 안내해온 저자는 성경 독자들이 성경 본문에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화가의 작품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자신의 체험을 먼저 밝힌다. 저자는 성경 본문이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 그 의미가 생명체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저자는 화가들마저 줄곧 반복해서 화법(畫法)을 달리하고 재료를 바꾸어 같은 본문, 같은 주제를 그린 경우가 있었음을 놓치지 않고 소개한다.
‘열린 책, 닫힌 독서’를 염려하는 저자만의 군걱정은 아니다. 우리 역시 같은 ‘토라(율법서)’를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삶을 산 예를 바리새파 사람들과 나사렛 예수에게서 본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람을 박해하고 죽이려 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안식일에도 병을 고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응수하셨다. 열린 말씀을 닫힌 법조문으로 읽어 스스로 말씀에 갇히는 닫힌 독서가 있는가 하면, 열린 성경 본문에서 해방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열린 독서가 있다.
저자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술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7쪽)”이라고 말한다. 구약을 형성한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문인들이 전승시킨 작품이다. 유대교의 이 세 지도층은 대극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는 셋 중에서 어떤 한 전승을 택하거나 다른 전승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능이 다른 세 전승이 함께 있어야 완전한 경전이 된다고 판단했다. 같은 시기에 태어난 초기 기독교는 랍비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사도 서간과 계시록을 한데 묶어 결합했다. 유대교에서 가져온 히브리어 성경을 〈구약전서〉라고 부르고, 기독교가 수집하여 정경으로 만든 그리스어 성경을 〈신약전서〉라고 불렀다. 초기 기독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합본하여 〈성경전서〉라고 하는 경전을 갖기에 이르렀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없이는 이런 상이한 대극적 전승들이 한 경전으로 결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전체의 맥락과 본문 자체를 주목하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지해주는 증빙구(證憑句) 같은 본문만을 선택하고, 급기야 그것을 지배적 본문으로 삼아, 나머지 본문을 해석하는 잣대로 활용한다면 성경의 신비한 세계는 삭막한 사막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들은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예술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성경이 지닌 역동적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_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