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과 연보에 집중한 충실한 작업,
하근찬 문업을 조망하다
하근찬 문학세계의 체계적 정리, 원본에 충실한 편집, 발굴 작품 수록, 작가연보와 작품 연보에 대한 실증적 작업을 통해 하근찬 문학의 자료적 가치를 확보하고 연구사적 가치를 높여, 문학연구에서 겪을 수 있는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근찬 문학전집은 ‘중단편 전집’과 ‘장편 전집’으로 구분되어 있다. ‘중단편전집’은 단행본 발표 순서인 『수난이대』, 『흰 종이수염』, 『일본도』, 『서울 개구리』, 『화가 남궁 씨의 수염』을 저본으로 삼았고, 단행본에 수록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하근찬의 작품들도 발굴하여 별도로 엮어내어 전집의 자료적 가치를 높였다. ‘장편 전집’의 경우 하근찬 작가의 대표작인 『야호』, 『달섬 이야기』, 『월례소전』, 『산에 들에』뿐만 아니라, 미완으로 남아 있는 「직녀기」, 「산중 눈보라」, 「은장도 이야기」까지 간행하여 하근찬의 전체 문학세계를 조망한다.
12권 『산에 들에』
강제 징용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수많은 봉례들
1984년 발표된 하근찬의 후기 장편소설 『산에 들에』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가을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여름까지를 배경으로, 전쟁이 동원이라는 형태로 민중의 삶의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산에 들에』는 가을, 겨울, 봄, 여름의 사계절로 나뉘어 있으며, 전쟁은 머나먼 곳의 일이었던 황달수 일가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급박하게 대응해야 할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는 전쟁을 하근찬은 ‘소문’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여준다.
하근찬은 ‘황달수’와 그 일가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이 전쟁과 같은 근대적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고 상처받는 상황을 포착한다. 그는 소설에서 이념화된 국민 정체성이 아니라 민중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즉, 『산에 들에』는 전쟁의 풍파 속에서도 낙천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따뜻한 성장의 이야기인 것이다.
마을 처녀들을 모두 징용으로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고, 열여덟 처녀 봉례의 아버지 황달수는 딸을 ‘데이신따이(정신대)’로부터 지키기 위해 서둘러 시집보낼 준비를 한다. 두만과 연인 관계였던 봉례는 그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진다. 혼례 당일, 할머니 황성녀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가 가족들에게 끌려온 봉례는 강제로 혼인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 순금이 ‘데이신따이(정신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만주 일대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황달칠’은 귀금속 헌납을 강요받다가 강제 징용의 대상이 되고, 소설 속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운동장에는 일본군 공병부대가 주둔한다. 작품 속 제국 일본의 동원은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변화를 남긴다.
이처럼 국가의 동원은 하근찬의 작품 속에서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위협으로 그려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의 동원은 사람들을 압박하지만, 그들의 세상은 국가가 만든 경계에 의해 갈라지지 않는다. 즉, 민중을 향한 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민중공동체를 단단히 지켜나간다.
해설에는 김요섭 문학평론가가 참여하여 기존 연구 성과에 현대적 관점을 더함으로써 현재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