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썼는가? - 「작가 후기」 중에서
783년 마리암 공주는 프랑크왕국 특사로서 코르도바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아헨으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이때 공주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2세기 후에 이 여정을 그대로 거슬러 마리암이 코르도바로 달려가고 더욱이 그러한 연결고리가 ‘라 메스키타’ 비밀일 줄은……
또한 1978년 마리암도 빈에서 코르도바로 기차여행을 하며 12세기 전에 마리암 공주가 거의 동일한 여정으로 아헨에 다녀간 사실을 미처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되돌아 내려왔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이 우주의 구동 원리를 인간은 알 수 없기에 필연적인 현상이 우연의 일치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게 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인간은 그 실체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진정한 본질은 의지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 전언의 의미를 되새기며 공감했다. 중세, 현대 등 시대를 막론하고 세계의 본질은 의지였다. 만약 의지가 없다면 모든 존재는 존재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삶을 영위하다 보면 의지보다 앞서는 ‘그 무엇’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순히 의지만 가지고 삶을 이어가기에는 이 세상이 경이로운 일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경이로운 일 중에서 첫째는 삶과 죽음이다. 과연 이러한 현상들이 의지대로 되는 것인가? 한 생명이 주어지고 그 생명을 거두어가는 일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그 무엇’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만남과 헤어짐이다. 이러한 행위들도 의지와 무관하다.
732년 ‘카를 마르텔’과 ‘알-가피키’가 본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투르-푸아티에’에서 만났다고 보기 어렵다. 화살이 날아와 ‘알-가피키’의 가슴에 꽂히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그들에게 만남과 헤어짐은 그렇게 주어졌다.
셋째는 사랑이다. 이것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와서 의지와 무관하게 멀어져간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랑은 모든 논리를 뛰어넘어 우리 곁에 늘 머문다. 특히 시공간의 초월성은 사랑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일 것이다. 그러하니 어찌 사랑을 인간의 의지에 한정시킬 수 있겠는가.
사랑!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들이 저 높고 높은 산을 넘고 푸르른 바다를 건너서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이 세계의 본질로서 의지를 존중한다. 의지의 명료함을 흐리게 하고자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의지보다 앞서는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 갈망 등이 마음속에 혼재되어 있었다. 두려움과 갈망은 상반된 개념이라 할 수는 없으나 한정된 범주에 함께 묶기도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과 갈망을 동시에 「마리암의 노래」에서 담아내고 싶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중세사 관련 부분 특히 제1부 18장 중세 기사수도회, 33장 중세 이슬람문명, 34장 ‘라 메스키타’ 그리고 제2부 1장 ‘투르-푸아티에’ 전투, 11장 중세 종교사, 17장 프랑크왕국, 19장 북아프리카 중세사, 25장 중세 과학사, 26장, 27장, 32장 등 고트어, 27장 중세 종교철학, 37장 ‘아헨 카테드랄’, 39장 이슬람사상 등의 부분에서 그리고 이외에도 일일이 언급하지 못한 문장들에서 존경하는 선학들의 도움을 적잖게 받았다. 그분들의 탁월한 저서, 논문 등이 없었다면 이 원고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마땅히 출처를 밝히고 참조한 문헌을 명기해야 하나 그 양이 방대하기도 하고 「마리암의 노래」가 역사소설임을 핑계로 그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발간 직전에 일부 작업을 진행하여, 전체 80개 장 중 16개 장에서 참조한 주요 문헌들의 목록을 ‘부록 4’에 명기해 놓았다.
본문 제2부 40장에 나오는 악보에 실린 곡은 「마리암의 노래」 초고 완성 직전이었던 2014년 늦가을 무렵에 저자가 꿈속에서 들었던 희미한 멜로디를 옮겨 적은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에 저자가 어디에선가 들었던 멜로디의 일부일 터이나 그 출처를 찾지 못하다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은 어느 선생님의 도움으로 악보화하게 되었다. 그분은 이 멜로디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특히 4악장 도입부와 비슷하다고 하였지만 그 출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거기에다 그분은 제1부 1장 아스트롤라베, 36장 ‘라 메스키타’ 이중아치, 제2부 26장 이중아치 형태 단면도 2종 등의 그림들도 모두 수작업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그려주셨다.
〈출판사 서평〉
1. 이 소설은 대중적이지 않다.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면 서양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고트어(인도ㆍ유럽 어족의 동게르만 어파에 속한 언어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가 등장할 뿐 아니라, 그 언어의 깊은 의미까지 밝히고 있으니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자가 흔치 않을 것이다. 덧붙여 이베리아반도 곳곳, 나아가 유럽에 남아 있는 문화·언어·역사적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은 일정한 지성과 끈기가 필요하다.
2. 이 소설은 그 어떤 ‘중세사 소설’보다 더 중세적이고, 더 역사적이며, 더 인문학적이다.
이 소설이 첫 작품인 학자이자 저자는 “비유럽권에서도 주목할만한 ‘서양중세사 소설’을 쓰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말할 것이다.
3. 이 소설은 입체적이며 창의적이다. 덧붙여 치밀하다.
소설에는 여러 언어, 표, 그림, 그리고 악보까지 등장한다. 중세 이베리아반도에서 출발한 상상력은 코르도바에 위치한 ‘라 메스키타’의 이중아치에 담긴 놀라운 비밀을 풀면서, 현대 빈에서 끝을 맺는다. 그 신비하면서도 깊은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한 글자, 한 장면, 한 건물, 한 지역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직접 보고, 듣고, 그리고, 걸은 후 글을 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은 섬세하고 틀림이 없다. 누군가는 소설인지, 역사서인지, 인문서인지, 문화사를 다룬 책인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책 뒤에 수록한 수많은 참고 자료를 보면 더더욱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소설이다. 소설의 소재와 주제는 빈틈없는 학문적 토대를 갖춘 반면, 이를 전달하는 방식은 추리적 기법 속에서 빠르게 진행하는, 상상력의 보물창고를 갖춘 소설이다. 누군가는 오히려 낯설게 느낄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