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면서는 알 수 없었던 오름이 품은 우주
그 익숙하고도 신비로운 야생의 땅에 닿다
제주 오름,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오름이 있긴 하지만 ‘어승생오름’은 그리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름이라고 하면 대개 산은 좀 부담스럽고 적당히 오르는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 찾게 되는데 어승생오름은 산만큼이나 높고, 숲이 우거져 있기에 관광 삼아 오름을 찾는 이들에게는 비교적 인기가 없는 듯하다. 오히려 한라산을 갈까 하던 등산객이 좀 더 쉬워 보이는 어승생오름으로 발길을 옮기는 경우는 많다.
고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고,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한다는 건 또 그만큼 야생의 숨결이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지질학자, 식물학자, 동물학자 그리고 여행작가 네 사람이 모여 처음으로 갈 오름을 정할 때 제주의 360여 개 오름 중 ‘어승생오름’을 택한 건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땅과 꽃과 나무, 새와 동물, 그리고 인간 삶의 터전
변하더라도 아프지 말고 ‘뀌뀌 오르난(오래오래 오르니)’
지질학자는 제주 섬의 탄생부터 제주 오름의 기원, 그리고 어승생오름의 생성 과정에 주목하며 오름을 오른다. 제주 섬 자체도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화산섬이지만 한라산과 오름 또한 화산 활동의 결과다. 이러한 특수성은 오름의 지형과 오름을 구성하는 땅, 물 그리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식물학자는 어승생오름에서 식물이 살아가는 방법에 주목한다. 구멍 뚫린 돌, 얕은 흙, 조릿대가 가득한 땅이라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옆으로 굵고 단단하게 뻗어낸 나무들은 애써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지만 이를 또다시 동물에 나눈다.
동물학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땅과 그곳에 뿌리내린 나무와 숲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동물들을 다룬다. 오름을 오르고 또 내려오면서 만난 혹은 떠오른 다양한 동물들의 이야기는 우리 삶과 닮아 있어 놀라움을 더한다. 두견이는 섬휘파람새 둥지에 자기 새끼 맡겨 키우고, 큰오색딱다구리가 만들어 놓은 둥지는 다음 해에 박새가 이어받는다. 가을에 임신한 노루는 먹이를 구하기 힘든 겨울철에 새끼가 배 속에서 잘 자라지 못할 것을 걱정해 착상을 지연시킨다니 동물의 세계도 사람만큼이나 복잡다단하다.
여행작가는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오름에 얹었다. 어승생오름의 어원, 일제강점기 수탈의 대상이자 전쟁의 진지로 사용된 어승생오름, 그리고 근현대사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오름이 보낸 오랜 시간을 가히 짐작게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글자로만 되어 있다면 자칫 지루할 수 있는데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풍경 사진과 동식물 세밀화들 덕분에 그 모습을 상상하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해 온 어승생오름에도 최근 관광 개발 등의 바람이 불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외래종 식물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 변화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가 무엇보다 어승생오름을 오래오래 오를 수 있게 해 주는 길이길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