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들어갔고,
로마 이후의 역사는 로마로부터 흘러 나왔다.”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왜 우리는 로마사를 공부해야 할까?’, ‘2,206년 로마 역사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이런 질문 앞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될 수도 있다. ‘기원전 753년에 세워져서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로마사는 이미 과거의 일이 아닌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로마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가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중요하다는 거지?’
당신의 의문에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겠다. 첫째, 이 책의 저자 모토무라 료지가 자신의 다른 책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에서 ‘세계사를 움직이는 7가지 코드(힘)’ 중 일곱 번째로 꼽은 ‘현재성’에 기대어서다. 그 책에서 저자는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라고 언명한다. 이는 역사란 어느 한순간, 한 장면도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지고 확장하며 ‘현재성’을 획득해간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2,206년간의 로마 역사 역시 어느 한순간, 한 장면도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지고 확장하며 ‘현재성’을 획득해간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로마사에는 인류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 “로마사는 사회학의 실험장이다”라는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말과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 들어갔고, 로마 이후의 역사는 로마로부터 흘러나왔다”라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말에 기대어서다. 두 학자의 말대로,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로마사의 위상과 무게감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세계사를 찬찬히 톺아보면 랑케의 말대로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 들어갔고, 로마 이후의 역사는 로마로부터 흘러나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고대 그리스 역사와 카르타고를 비롯한 고대 지중해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 흡수되었고, 중세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유럽 역사가 로마사라는 거대한 수원(水源)에서 흘러나왔으며, 그 영향이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로마사를 움직이는 12가지 힘』의 본문 맨 앞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가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자.
“반세기 가까이 로마사를 연구해온 나는 연구 과정에서 눈에 들어온 깨달음이 적지 않다. 가령 세계 제국으로서의 로마 제국을 원형으로 삼는다면 근대 해양 제국 중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해서도, 식민지를 줄줄이 거느린 대영제국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리라 믿는다. 또 21세기 미국이라는 ‘제국’과 중국이라는 ‘제국’에 대해서도 로마사를 좌표축으로 삼으면 모종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 비극은 되풀이해서 ‘휴브리스(Hubris, 오만ㆍ교만)’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가르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사는 대단하다’는 주장을 남발하면 휴브리스의 교훈을 거스르게 된다. 그러나 ‘세계사라는 바다를 항해할 때 로마사를 좌표축으로 삼는다면 학습 효과가 달라지리라고 자부한다.”
2,206년 장대한 로마사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12가지 코드
이 책 『로마사를 움직이는 12가지 힘』은 로마사 일본 최고 권위자이자 도쿄대 명예교수이며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의 저자인 모토무라 료지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로마사’ 관련 최고의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화정’, ‘회복탄력성’, ‘공공성’, ‘대립과 경쟁’, ‘영웅과 황제’, ‘후계 구도’, ‘선정과 악정’, ‘5현제’, ‘혼돈’, ‘군인황제’, ‘유일신교’, ‘멸망’의 12가지 코드를 통해 2,206년 장대한 로마사를 명쾌하게 설명하며, 그 로마사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날카롭게 통찰한다.
1. 공화정(Republican Government) - 로마를 지탱하는 중심축의 하나인 ‘공화정’은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흥미롭게도, 이는 이민족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제7대 로마 군주가 된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로마의 귀족 콜라티누스의 아내로, 아름답고 정숙한 유부녀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에 로마인들이 대응하는 과정에 형성되고 자리 잡았다. 로마인들이 독재 정치와 독재자를 그토록 경계한 연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 회복탄력성(Resilience) - 많은 시련과 역경, 실패를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하는 ‘회복탄력성’은 로마인의 가장 대표적인 자질 중 하나다. 로마인은 오랜 세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승리와 패배, 영광과 치욕의 순간을 겪었는데, 패배와 치욕의 시간마다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실패에서 교훈을 배우며 그 쓰라린 패배와 치욕을 찬란한 승리와 영광으로 바꾸어냈다.
그중 하나로, 기원전 321년 삼니움족과 벌인 카우디움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군과 로마인이 이후 그 쓰라린 패배의 굴욕에 무너지지 않고 절치부심하며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 군단을 재편성한 뒤 끝내 삼니움군을 무찌르고 멋지게 원수를 갚아준 사례를 들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게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해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으나 끝내 좌절하지 않고 스키피오를 사령관으로 임명, 군대를 정비하고 오히려 한니발의 전법을 효과적으로 벤치마킹해 최종 승리를 거두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일이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을 잃어버렸을 때 로마인은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다가 게르만족과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했다.
3. 공공성(Publicness) - 로마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적 개념’, 즉 ‘공공성’을 발견한 민족이다. 실제로 고대 로마는 예컨대 당대의 경쟁국 페르시아나 그리스와는 달리 조국, 국가 등 ‘공공’에 헌신한다는 마음가짐을 귀족은 물론 민중까지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철두철미한 ‘공공성’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도약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인의 ‘공공성 상실’은 인프라 노후화로 이어졌고 멸망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4. 대립과 경쟁(Confrontation&Competition) - 숙적 카르타고와 벌인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고 제국의 기틀을 다진 로마는 이내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 정복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과 토지 등의 부가 귀족 등의 일부 기득권층에 의해 독점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켜졌고, 오래 이어진 전란의 영향으로 농지가 황폐해지면서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농지를 등지게 되자 귀족들이 그 토지를 차지해 부를 늘림으로써 빈부의 격차가 더욱더 심해진 탓이었다.
이렇게 되자 로마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주와 농민(소작농)’, ‘귀족과 평민’ 등으로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로 인한 심각한 사회 문제를 극복하고,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평민의 권리와 이익을 되찾아주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을 시도했으나 귀족 등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로 좌절되고 두 형제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로마는 각각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간판을 내걸고 ‘평민파’와 ‘벌족파’가 치열하게 대립하며 혼란과 공포의 시기를 보냈으며 원로원을 끼고 두 걸출한 영웅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내전까지 겪으며 경쟁하는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했다.
5. 영웅과 황제(Heros&Emperors) - 2,206년 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웅을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카이사르’다. 그는 8년간의 갈리아 원정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비약적으로 넓혔고, 역사상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대단한 전공을 세웠으며, 최고의 라이벌 폼페이우스와의 경쟁에서 열악한 상황과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로마를 개혁하기 시작했고 대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그렇다면 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황제를 꼽으라면 누구일까? 5현제 시대의 다섯 황제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의 명군도 있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라 초대 황제가 되면서 로마를 대제국으로 발돋움시키고 국력을 다지고 민생을 안정시킨 ‘아우구스투스’를 꼽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 두 걸출한 영웅과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로마는 위대한 세계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6. 후계 구도(Succession Structure) - 카이사르는 공화파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 왜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인 데다 병약하고 군사 재능도 뛰어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을까?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지닌 탁월한 ‘위정자의 자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역사상 최악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찬란한 5현제 시대의 문을 연 네르바가 자신의 후계자로 트라야누스를,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명했을 때 로마는 ‘흥’과 ‘성’의 길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가 군왕의 자질이 없는 자기 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을 때 제국의 미래에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는 ‘후계 구도’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7. 선정과 악정(Good Poitics&Bad Politics) - 희대의 폭군 네로가 죽고, 100년 가까이 이어진 율리우스ㆍ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로마는 누구를 제위에 앉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런 심한 혼란 속에서 고작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군대의 힘을 입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줄줄이 서로 죽이고 죽으며 제위를 차지했다. ‘세 황제의 난립기’를 종식하고 로마를 안정시키며 새로운 왕조를 성립한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그는 ‘최고 지휘권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여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을 잠재웠다. 또 그는 소변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현명한 짠돌이 정책’으로 재정 회복을 이루며 선정을 베풀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꼽히는 ‘콜로세움’이 세워진 것도 그의 치세에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서거한 후 그의 큰아들 티투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치세 동안 폼페이 피해자를 성심성의껏 구제하고 100일간 경기를 개최해 실의에 빠진 민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이자 티투스 황제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르자 그는 무차별 학살과 시행을 일삼으며 재위 기간을 악정으로 채웠다.
8. 5현제(Five Good Emperors) -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현군들의 시대’로 칭송받는 5현제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은 네르바 황제다. 그런데 그가 5현제 시대를 열게 된 배경에는 약간 우연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내막이 숨어 있다. 이는 황제였던 그가 군대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한 ‘후계자 선택’이 역설적으로 가장 찬란한 ‘5현제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네르바 황제로부터 시작된 5현제 시대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를 지나며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세웠으며, 90여 년간 안팎으로 평온하고 행복한 시대를 맞이하게 해준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황제’로 꼽히는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좀 더 정확히는 그의 사심이 담긴 어리석은 후계자 지명으로 인해 현군들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고 극심한 혼란의 시기와 군인황제 시대를 거쳐 멸망의 길로 달려간 것은 또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9. 혼돈(Chaos) - 5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아들 콤모두스는 돈으로 평화를 사고 온갖 기행과 악행을 일삼으며 제국을 안팎으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추락시킨다. 그 탓에 그는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 최악의 황제들과 함께 로마를 멸망으로 몰고 간 원흉으로 지목받는다.
그의 사후 로마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지위를 경매에 부쳐 돈으로 사고파는 목불인견의 상황까지 겪다가 그 끝에서 또 다른 최악의 황제 엘라가발루스까지 등장해 제국을 수습 불가능한 혼란의 절정으로 몰고 가는데…….
10. 군인황제(Military Emperors) - 혼돈의 시대를 지난 로마는 최고의 세계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들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이른바 ‘군인황제 시대’의 시작이다. 끔찍한 군인황제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장본인은 알렉산데르 황제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다. 이후 군인황제 시대는 수십 명의 피로 물든 군인황제를 배출하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대에 이르러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11. 유일신교(Monotheism) -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제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 시대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성립되고 로마 제국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기독교는 오랫동안 신자 수가 늘지 않고 정체해 있었다. 그러다가 3~4세기 군인황제 시대에 눈에 띄게 신자 수가 많아지고 세력도 강해졌다. 이유가 뭘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당대의 기독교가 유대인에 갇혀 있던 ‘민족의 벽’, 대도시 가난한 사람들에 갇혀 있던 ‘계급의 벽’, 대도시에 갇혀 있던 ‘거주지의 벽’이라는 세 가지 벽을 성공적으로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세상이 혼란하고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제국은 황제가 난립하고, 군인이 함부로 무력을 행사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삶이 팍팍해지고, 국경에서는 이민족이 수시로 침입하고, 전장에서 돌아온 군인이 도시에 역병을 퍼뜨리는 등 그야말로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암담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독교의 ‘유일 절대신’이라는 강력한 신이 장악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급성장한 유일신교 기독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등의 시대에 탄압받다가 콘스탄티누스 이후 대다수 황제에 의해 비호받으며 제국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12. 멸망(Fall) -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자라고 번성하다가 쇠퇴의 과정을 거쳐 죽고 소멸해간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며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생명체처럼 탄생과 발전, 번영과 쇠퇴를 거쳐 몰락하고 사멸한다. 이것이 우리가 쉼 없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로마사는 탄생과 발전, 부흥과 쇠락이라는 문명의 기승전결 과정을 그 어떤 나라의 역사보다 뚜렷이 보여준다. 더구나 그 기승전결이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의 한평생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극적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나온 주장을 모두 합하면 210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것을 한 가지로 압축해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관용을 잃어버린 로마, 자기 심장에 비수를 꽂다!’ 정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