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전투의 참극에서 살아남다
6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사자같이 싸운 나의 유보트 승조원들이여. 물질적으로 압도적인 우세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궁지로 우리를 몰아붙였다. 여러분들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영웅적인 전투 끝에, 당당하고 부끄러울 것 없이 무기를 내려놓기 바란다. 우리는 총통과 조국을 위해 쓰러진 전우들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것이다. 동지들, 조국의 미래를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분전했던 정신을 보전하라. 독일이여, 영원하라.
― 여러분의 사령관
1945년 5월 5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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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전투의 참극에서 살아남다
6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사자같이 싸운 나의 유보트 승조원들이여. 물질적으로 압도적인 우세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궁지로 우리를 몰아붙였다. 여러분들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영웅적인 전투 끝에, 당당하고 부끄러울 것 없이 무기를 내려놓기 바란다. 우리는 총통과 조국을 위해 쓰러진 전우들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것이다. 동지들, 조국의 미래를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분전했던 정신을 보전하라. 독일이여, 영원하라.
― 여러분의 사령관
1945년 5월 5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인 카를 되니츠(Karl D?nitz)는 전문을 통해 살아남은 유보트 승조원들에게 연합군을 향한 모든 적대행위가 끝났음을 알렸다. 이어 5월 8일 독일이 항복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하면서 5년 8개월간의 대서양전투(1939년 9월~1945년 5월)는 막을 내리게 된다. 되니츠는 살아남은 승조원들에게 ‘분전했던 정신을 보전하라’고 했지만, 실제로 유보트에 타고 대서양전투를 겪으며 막바지에는 동료들 대부분이 수장당하는 참극에서 살아남은 승조원들에게 그 당부는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모두가 두려워한 무적의 유보트 함대
『강철의 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해군 잠수함대에서 복무한 헤르베르트 A. 베르너의 회고록으로,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1941년부터 종전까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이다. 베르너는 대서양전투가 한창이었던 1941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잠수함대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신임 사관후보생으로 유보트 승조원이 된 그는 당시 유보트 작전을 전개한 대서양과 영불 해협, 북해, 발트 해, 지중해와 노르웨이 해 등을 항해하며 대서양전투를 겪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연합군의 생존과 승리는 해상 보급로의 유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보급물자를 실은 연합군의 선박들을 수장시키고자 하는 독일 해군과 이에 맞선 연합국 해군, 공군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대서양전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대서양전투에서 독일 해군의 가장 위력적인 공격 수단은 유보트 잠수함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잠수함 보유가 금지된 독일은 편법을 통해 잠수함 건조 기술 및 운영 능력을 유지한다. 독일은 1935년경부터 대서양전투에서 활약한 유보트 Ⅶ형을 건조하기 시작하는데, 실제로 대서양전투 초기, 유보트는 연합국의 해상 보급로를 효과적으로 파괴해 연합국의 전세에 큰 타격을 입힌다.
유보트가 개전 초기에 보여 준 파괴력과 가능성은 놀라웠다. 불과 44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는 조그만 잠수함으로 연합국의 거대한 호송선단을 잇달아 격침시키는 유보트의 활약상은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나치의 선전성이 더해지면서 유보트 승조원들은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다. 이 시기는 유보트의 황금기이자 되니츠가 제안한 늑대 떼 전술(유보트의 야간 집단 공격)이 빛을 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겪었기에 쓸 수 있었던 유보트 함장의 실제 체험담
베르너는 이 황금기의 마지막 무렵인 1941년에 유보트 근무를 시작한다. 책에서는 제1부 ‘영광의 시기’에 해당되는, 대서양전투에서 유보트가 연전연승을 거두던 시기이다. 처음에는 흔들리는 잠수함에서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던 베르너는 항해가 거듭되고 유보트전 특유의 추격과 공격에 익숙해지면서 자신감 넘치는 승조원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전세는 곧 뒤집힌다. 제2부 ‘우리 머리 위의 지옥’에서는 연합국이 호위선단 체계를 정비하고 대잠 전력을 강화하면서 급증하는 유보트의 손실이 그려진다. 특히 독일에서 ‘암흑의 5월’이라 부르는 1943년 5월 한 달 동안 독일은 43척의 유보트를 잃을 정도로 전세는 빠르게 역전된다. 갑작스럽게 동료 유보트들의 침몰 신호가 이어지고, 연합국의 호송선단들이 자체적으로 항공모함의 호위를 받게 되면서 유보트의 기습공격이 불가능해진다. 베르너는 혼란에 빠진다.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도 유보트의 부장으로서 수뇌부의 명령대로 미국의 체서피크 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영국 해군의 주요 기지인 지브롤터 해협을 돌파해 초계 임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작전 해역이 곧 자신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독일의 패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지는 제3부 ‘재난과 패배’에 이르면 베르너는 작전이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유보트의 함장으로서 구형의 낡은 유보트를 끌고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제대로 공격을 해보기는커녕 잦은 기기 결함과 강력한 연합군의 방어 태세로 인해 생명을 부지하기도 급급한 처지가 된다. 유보트 함대는 연합군에 맞설 만한 새로운 장비나 무기도 갖추지 못하고, 충분한 숫자의 잠수함을 건조하지도 못한다. 수뇌부에서는 계속해서 작전 지시가 내려오지만 유보트들은 더 이상 이전의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이는 승조원들의 기량과 대담성으로 메워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승조원들은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자신들의 유보트를 관 삼아 대서양 곳곳에서 수장당한다. 결국 종전을 맞이했을 때 살아남은 유보트 승조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극소수 승조원들의 리더였던 유보트 함장은 존재 자체가 드물기도 했지만 실제로 체험담을 남긴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강철의 관』은 1969년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역사적 사건의 향방에 가려진 개인의 얼굴을 보여주다
실제 함장이었던 인물이 들려주는 유보트전이라는 점에서 워낙 극적이기도 하지만 긴박감 넘치는 전투 장면의 흡입력과 바다와 육지에서의 전황의 변화에 따른 생생한 묘사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여기에는 베르너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매력도 한몫한다. 이 책의 에필로그는 그가 연합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베르너의 진가가 발휘되는 부분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향한 집념으로 그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그가 탄 기차가 무사히 독일 국경을 통과해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숲으로 뛰어드는 마지막 장면은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는 전후의 승자와 패자를 떠나 한 인간의 생명력에 대한 순수한 감동 때문일 것이다.
베르너는 서문에서 ‘헛된 대의명분에 대한 헌신 속에서 끔찍하게 많은 유보트 승조원들이 죽었다. …… 너무나 많은 우리들의 생명이 불충분한 장비와 터무니없는 정책으로 인해 헛되이 스러졌다’고 밝힌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대서양전투 속에서 죽어간 동료들을 위한 헌사인 동시에 당시 독일 해군 수뇌부에 대한 고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또 다른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사’라는 역사적 사건의 향방에 가려진 ‘개개인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개인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때론 거대한 전쟁사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까지 담아낸다. 우리는 베르너의 이야기를 통해 70여 년 전에 벌어졌던 바다 위의 전쟁, 그 생생한 속살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