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은 어떻게 흔들리는가”
무사유부터 전체주의까지, 외로움의 결과들
아렌트의 저서들을 붙박이별 삼아 외로움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이 책은 ‘아렌트 내비게이션’이라 부를 만하다. 저자는 각각의 저서가 어떠한 사유와 개념을 통해 외로움을 경고하고, 또 극복의 실마리를 제시하는지 소개한다.
아렌트의 대표작 《인간의 조건》은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으로 ‘행위’를 꼽는다. 행위란 생각을 나누는 활동이다. 일종의 소통인데, 단순한 교류와 다르다. SNS로 수많은 사람과 초연결되어 안부를 묻고 근황을 뽐낸다고 해 진정한 소통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보다는 자발적으로, 또 동등하게 서로의 관점을 드러내고 협의하며 토론하는 과정이 행위다. 마치 이상적인 정치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아렌트는 행위를 ‘정치’로 정의했다. “행위는 정치”고, 따라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25~27쪽, 45쪽).
여기에 외로움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외로운 인간은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는 외톨이,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접촉하지 않는 외톨이”다. 소통(접촉)하지 않으니, 생각을 나눌 수 없고, 종국에는 생각하는 능력 자체를 잃는다. 검토하고 비판하지 않으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다. 단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다. 거리를 가득 매운 각종 ‘○○○부대’를 떠올려보라. 《전체주의의 기원》은 이들 “성난 개인”이야말로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라고 꼬집는다(100쪽). 누군가와 강하게 동일시하면서도 그 누군가를 감히 평가하지 않는 이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구호를 공격적으로 내뱉는 이들, 그래서 아무 논리 없이 오직 공포로만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이들이 출몰한다면 경계해야 한다(104~109쪽). 그들이 정치를 질식시킨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공화국의 위기》는 ‘시민불복종’을 제안한다(170~171쪽). 건강한 시민은 공동체를 향한 위협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며, 때로는 국가권력에 맞설 정도로 강력히 연대한다. 실제로 우리는 불과 몇 년 전에 부정한 권력을 평화적으로 몰아낸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짙은 위기감에도 왜 연대하지 못하는가? 문제는 역시 외로움이다. ‘우리’라는 개념 자체가 실종된 탓에, 모두가 똑같이 문제의식을 느껴도, 아무도 손잡지 않는다. 외로움에 잠식당한 사회에서 연대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전히 만날 수 있다”
이해의 불가능성과 사랑의 가능성
우리는 어떻게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 실마리를 《라헬 파른하겐》에서 언급된 ‘이해’에서 찾는다. 아렌트는 이해를 “동의와 동조와 동감 없이” 상대의 처지에 서보는 일로 이해했다. 상대를 무조건 포용하자는 말이 아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판단을 미루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232쪽). 동시에 아렌트는 인간의 마음속엔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일찍이 인정했다. 쉽게 말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이다(49~50쪽). 그런즉 이해란 판단할 수 없음과 알 수 없음을 상정한, 겸허한 다가섬이다.
따라서 이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위다. 온갖 불가능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시도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이해는 오롯이 내 의지에 달린 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생면부지의 상대와 ‘동행’할 기회가 된다(216~219쪽). 바로 이 지점에서 외로움은 힘을 잃는다. 그렇게 함께하게 된 이들이 세상을 바꾼다. 비근한 예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민주주의는 수많은 이가 동행하며 피를 쏟은 결과다.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발 더 나아가 이해의 끝에서 우리가 ‘세계’와 만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모두 나름의 방식대로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가 경험한 세계와 만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의 지평이 확장됨은 물론이고, 상대 또한 나와 별다르지 않게 세계를 살아가는 “숙명의 동반자”임을 알게 된다(294~297쪽). 아렌트는 이러한 깨달음에서 “이웃(세계)사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외로운 인간은 이해와 사랑을 통해 이웃에게 나아가고, 그럼으로써 세계와 만난다(299~300쪽).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네다”
정치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정치적 인간
아렌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실의 모든 문제는 정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정치를 행위로 이해한 아렌트는 어떤 절차와 규칙, 목적과 결과보다도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즉 정치가 “선거운동, 공천, 투표, 자금, 정쟁 그리고 정권 창출을 위한 다툼이나 국회에서 고성이 오가는 장면”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이해는 여전히 경직되고 협소하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나 정당이 선거에서 이겨 권력을 차지하기만 하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정말 세상은 나아졌는가? 누구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할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는 정치가 쪼그라들어 제 역할을 못하는 틈에 ‘거짓’이 싹튼다고 경고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치(행위)의 핵심은 생각과 소통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정치적인 인간은 각종 사안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그 견해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그만두는 순간 “사실적 진리를 거짓말들로 교체”하는 일이 발생해도 알 수 없다. 이는 가짜뉴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72~73쪽).
결국 우리를 괴롭게 하는 각종 문제는 스스로 ‘정치’를 포기하고, 소위 ‘현실정치’에만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이러한 책임 전가의 이면에도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외로운 인간은 축구 경기 보듯 정치를 대한다. 자신이 필드(공적 영역)에 나가 함께 뛸 생각은 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조건적인 상찬과 비난에만 열을 올린다. 오늘날 우리가 생생히 경험하듯이, 이 경기에는 승자가 없다. 단지 정치혐오만이 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치의 회복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국회의원 배지 따위가 아니다. “설득력 있게 내 의견을 발언하고, 신중하게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그때 정치는 정치다워지고, 인간은 외로움의 장막을 걷어낸다(57~58쪽). 그 첫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건네는 것, 이것이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의 진짜 목적이다.